1.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재현은 눈을 떴다. 시간은 새벽 네 시 반. 미리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까지는 아직 두 시간하고도 반이 남아있었다. 부쩍 차가워진 바깥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와 미처 이불을 다 덮지 못한 재현의 두 발을 더욱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재현은 거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얼음처럼 꽁꽁 얼어있는 것이 어찌 재현의 두 발뿐이었겠는가. 오히려 차가워진 그 두 발이 온종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재현의 몸과 마음을 모두 통틀어 봤을 때 가장 따뜻한 곳일지도 몰랐다.
3년이란 시간은 재현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것이었다. 아파하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길었고, 그렇다고 해서 인국의 부재를 모조리 소화해 내기에는 또 너무 짧았다. 그래서 그간 재현은 적당히 죽지만 않을 정도로만 내내 아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과 같은 다이내믹한 감정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누가 보면 친한 친구의 장례치고는 너무 정이 없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재현은 내내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덤덤했다. 유일하게 인국의 영정사진을 보았을 때만은 어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마저 인국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재현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정을 아는 직원들의 걱정과 달리 재현의 출근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에 지장이 생기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갑자기 감상에 젖는 일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마치 인국이 없었던 그날들처럼. 언제나 그렇듯.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재현이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늘어만 갔다. 딱히 그 시간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번쩍 눈이 저절로 떠졌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도, 동료가 권해준 격렬한 운동도, 끊임없이 바쁜 업무 후 찾아오는 피곤함마저 재현의 눈을 감겨주지는 못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재현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여전히 이불을 덮은 채 굳이 깨진 수면 패턴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앞으로 재현은 다시는 영원히 깊은 잠에 들 수 없을 터였다. 이것이 바로 인국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못한, 인국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한 자신에게 주어진 벌일 테니. 그래서 재현은 기꺼이 몇 번이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의 검은 등을 바라보았고, 모질 만큼 시린 새벽들 또한 견뎌내었다.
"끙 차"
일부러 입소리를 내며 재현이 두 발을 침대 아래로 내디뎌보았다.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 해서 줄곧 침대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늘은 중요한 출장이 잡혀있는 날이었다. 여태 맡아본 설계 중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일이었던지라 재현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해 다른 두 명의 직원이 함께해 주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퇴근 후 미처 미리 싸지 못한 짐을 싸고 몸단장을 하는 데에 한 시간.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또 한 시간. 그즈음이 되면 영원히 울리지 않을 것만 같던 저 알람도 요란하게 울릴 때가 되었으리라. 그러니 재현에게 더 이상 뭉그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질척이는 늪 속에서 언제까지고 끊임없이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그는 오늘도 살아있었고, 살아내야만 했기에.
2.
몇 년 만에 또 이 풍경을 보게 된 걸까. 여전히 푸르기만 한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재현은 생각했다. 마지막 기억이 인국과 함께였던 걸 보면 적어도 10년은 넘게 온 적이 없을 터인데 놀라울 정도로 풍경이 변하지 않았다. 인국과 슬러시 하나 덜렁 들고 앉아있던 그 벤치도, 뜬금없는 곳에 있다며 깔깔 웃어댔던 낡은 인형 한 쌍도 모두 그때 그대로였다. 변한 건 오직 하나, 인국이 이곳에 더 이상 올 수 없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소장님 괜찮으세요?"
마음의 통증이 또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귓가에 자신을 걱정하는 직원들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현은 제 감정을 다독이는 것만 해도 벅차 그들에게 답을 해 줄 여유가 없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게 소름 돋을 만큼 그때와 다를 바 없는 눈앞의 광경들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이상 이곳에 함께 올 수 없는 누군가를 또 떠올려버렸기 때문인지 재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회사로부터 출장지를 전달받았을 때부터 뒤따라왔던 두통과 메스꺼움이 이제 한계치에 임박해있다는 것이었다.
"괜찮다니까요 정말."
차를 타고 여기에 오기까지 몇 번이고 반복된 질문이었다.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겨우 잠든 척하는 것으로 상황을 회피했지만 아무래도 직원들은 그것만으로는 영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재현을 집으로 보낼 것만 같은 무서운 기세로 재현의 주위에 모였다. 재현은 한껏 치켜 올라간 그들의 눈썹을 보며 애써 입꼬리를 잡아 올려보려 했다. 일정 파기라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물론 재현도 어떤 의미로는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 당장 렌터카 트렁크에 있는 자신의 짐만 빼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재현이 담당하고 있던 프로젝트의 사전 조사에 있었다. 재현 없이 직원 둘이 소화해 내기에는 버거운 일정이었다. 고작 사적인 감정 따위에 휩쓸려 일정에 차질을 주고 자신을 위해 어렵게 시간을 내준 직원들을 고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재현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버릇처럼 왼손에 있는 손목시계의 줄끈을 한 번 고쳐 맸다. 그리고 적당히 주위를 둘러본 후,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카페(로 추정되는 곳)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침이라 영 컨디션이 안 좋기는 하네. 카페인이라도 좀 수급해 볼까."
나름 재밌는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말해봤는데 효과는 아주 미미한 듯했다. 여전히 그들은 재현의 얼굴색을 몇 번이고 살피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아파 보이나? 내가 아침에 거울 봤을 때는 그렇게까지 심각해 보이진 않았는데.'
본인은 자신의 얼굴을 매일 보는 탓에 아픈 얼굴에도 익숙해져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재현은 생각했다. 다행히 직원들은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 자체에는 찬성이었는지 금세 표정을 풀고 재현보다도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마 이른 집합 시간에 직원들 역시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탓도 있으리라. 직접 오늘의 일정 전체를 계획했던 재현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를 우렁차게 외치는 그들을 보며 어떤 일말의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저녁에는 맛있고 비싼 고기라도 사줘야겠네. 주문을 마치자마자 하나같이 책상 위로 녹아내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재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한 지 3시간 만에 겨우 머릿속을 맴도는 인국과의 추억을 내려놓고 기분 좋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3.
카페에 앉아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앉아있다 간다는 게 몸이 아직 노곤해서 조금만 더, 손발이 아직 녹질 않았으니 조금만 더, 여기 케이크가 너무 맛있으니 조금만 더... 그렇게 갖은 핑계를 대는 사이 2시간쯤은 지난 듯했다.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은 오후에야 있으니 상관이 없었지만 미리 도착해서 주위 환경을 전체적으로 둘러본다는 하나의 목표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일도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소장님은 너무 여유가 없으셔. 재현의 풀어진 얼굴에 안심했는지 제법 평소처럼 농담도 툭툭 던지게 된 직원들은 그렇게 말했다. 눈코 뜰 새 없이 일만 하고 살던 요즈음을 떠올려보면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니었던지라 재현은 그들의 훈수를 정중히 받아들이고 이곳에서 조금만 더 쉬어보기로 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커피의 향이 그런 재현의 마음을 더욱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밀려들어오는 추억에 질식할 것만 같이 괴로웠던 재현은 폭신한 카페 소파에 더욱 깊숙이 등을 대고 온몸에 힘을 뺏다. 간만에 느껴보는 심신의 평화였다.
"달이 너 또 지각했지!"
그런 재현의 평온을 깬 것은 방금 전까지 커피 맛은 어떠냐며 테이블까지 찾아와 수다를 떨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던 카페 주인의 목소리였다. 엿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고요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귀 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주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조그만 카페에는 '달이'라는 아르바이트생이 있으며 지금 시간은 원래대로라면 그가 홀로 일하고 있어야 할 타임이었다. 그런데 '달이'씨는 훌륭하게도 그중 몇 시간을 늦잠을 자느라 말아먹었으며 오늘 시내에 나가봐야 할 용건이 있었던 주인은 손님인 우리 앞에서는 그런 티를 하나도 내지 않고 있었지만 내심 맘을 졸이며 '달이'씨의 연락을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와, 정말 프로이시네. 이 심각한 분위기에는 맞지 않는 감상평이었지만 재현은 순수하게 주인의 직업정신에 감탄하고 말았다.
"어휴 됐어. 뭘 말해도 끄떡도 안 하지 이 꼴통. 얼른 일 할 준비나 해."
날카로운 주인과 덤덤하기 짝이 없는 '달이'씨.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창과 방패의 싸움에서 결국은 '달이'씨가 주인을 이긴 모양이었다. 어쩜 저렇게 태평할 수가 있지. 킥킥 웃는 직원들 사이에서 재현은 '달이'씨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그는 마치 아무리 주인이 싸늘하게 굴어도 결국 자신을 내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시종일관 무던한 말투를 하고 있었다.
"예 죄송합니다."
"아... 뭐... 그렇죠?"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죄다 이런 것들 뿐이었으나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노발대발하던 주인은 잔소리를 한바탕 쏟아부은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렇게 손님이라고는 재현과 일행들 밖에 없던 공간에서 말 많고 친절한 주인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도 그 공간에는 오로지 감미로운 팝송과 자연스러운 침묵만이 남게 되었다. '달이'씨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를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사부작거리는 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다. 좀 전까지 웃고 있었던 직원들도 이 조용함 사이에서 소음을 내기는 차마 그랬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다물고 저마다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커피라도 한 잔 더 시켜볼까. 딱히 배가 고프다거나 목이 마른 것은 아니었지만 재현은 이제는 텅 비어버린 커피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저런 치명적인 실수마저 덮어줄 정도라면 그의 커피 내리는 솜씨가 기가 막힌 걸지도 모르잖아. 변명이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것도, 이렇게 타인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것도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 채 재현은 '달이'씨가 있을 카운터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를 보는 순간, 재현은 침몰했다.
4.
남자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남자는 티끌 하나 없는 그것을 보고는 여기가 어딘지를 생각하였다. 평소 자주 보던 본인 집의 천장과는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언제나 일상적으로 보고 살아왔던 내 '집'의 천장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남자는 저도 모르게 '아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제법 다급해 보이는 몇 명의 사람들이 남자의 주위로 요란스럽게 모여들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들은 의사인 것 같았다. 의사? 아, 그래 의사. 그럼 여기는 병원이겠구나.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남자의 온몸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의 짜릿한 통증이 한 번에 확 번져 올랐다. 남자는 그 아찔한 감각에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남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역시나 새하얀 천장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처음 봤을 때는 티끌 하나 없이 하얬던 그것이 바깥에서 새어 들어온 햇빛을 받아 군데군데 노란빛으로 물들어있었다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이번에 그는 낮에 일어난 것이었다. 어쩐지 밖이 엄청 시끄럽다 했어. 남자는 한숨을 쉬고는 조심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전히 통증은 가시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어제만큼은 아니었다.
"일어나셨어요?"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용케도 남자의 기척을 알아챈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제 몰려왔던 무리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의사이거나, 혹은 간호사일 것이다. 어느샌가 남자의 팔에 꽂혀있던 링거를 조절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했다.
"어.... 어..."
남자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을 한꺼번에 삼켜버리기라도 한 듯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소리를 내보려고 해도 쇳소리만 새어 나와 단어를 만들 수조차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좀 물어보려 했건만. 그러나 남자는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묻고자 했던 질문의 답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뒤늦게 들어온 늙은 의사 역시 남자가 제일 알고 싶었던 것을 궁금해했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남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목이 아파서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는 단순히 자신의 이름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의사의 수많은 질문들 중 남자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름, 나이, 직업, 주거지... 평범한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을 모든 것들을 남자는 단 하나도 알지 못했다. 기억상실증인가 보네요. 그렇게 말한 의사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의 아침, 그는 기온이 뚝 떨어진 겨울 바다의 모래사장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를 발견하고 119에 신고한 카페 주인은 오랜 시간 그 일대에서 살아온 그 지역 토박이였으나 그를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외관상으로는 큰 상처가 없어 보였으나 신변 조회를 위해 채취한 지문은 심각하게 망가져 있어 데이터베이스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 수가 없었으며 소지품에서도 신변을 특정 지을 수 있는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여행하러 온 사람이면 지갑에 신분증이나 카드 정도는 들고 다녔을 텐데 그런 것은 고사하고 그는 이 날씨에 외투도 한 벌 걸치고 있지 않았다. 얇은 스웨터에 청바지만 입고 바다에 찾아온 남자.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온몸이 흠뻑 젖은 채 파도에 밀려 물가에 쓰러져있던 남자. 경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이곳까지 일부러 온 것이라 짐작하며 그가 깨어난 후 자세한 수사를 이어 나가겠다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의 그를 수사한들 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깊어져 가는 의료진의 근심을 알지 못한 채 남자는 천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5.
달은 당황스러웠다. 지난밤 늦은 시간까지 게임을 하다 지각을 한 그는 사장님으로부터 한차례의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들은 후 이제야 겨우 일 할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오기 전부터 이미 한 팀의 손님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야 카운터가 이렇게나 어질러져 있었으니까. 커피 내리는 솜씨 하나는 끝내주는 사장이었지만 단점이 있다면 그 내리는 과정에서 주변을 너무 뒤죽박죽으로 어지럽히고, 또 그걸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체도 모를 나 같은 놈을 본인 뒤치다꺼리할 쫄따구로 들인 거라고 했지.'
물론 사장의 그 말을 달이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애초에 본인이 베푼 선행을 본인 입으로 떠벌떠벌 과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짓을 어떻게 하냐며 손사래를 치면 쳤겠지. 달에 대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는 멀리 유학 갔었던 조카가 잠시 돌아와 있는 것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러니 저런 말들도 죄다 그놈의 쑥스러움을 숨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솔직히 달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들은 신경 쓸 가치조차 없었다. 아무렴 어떤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녀는 기억을 잃고 신분도 모른 채 갈 곳 없는 달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은인이지 않았던가. 생판 남인 그를 위해 그녀는 병원에서의 치료비를 대신 지불해 주었고, 카페 근처 빈방에 그가 머물 숙소도 마련해 주었다. '달'이라는 이름도 그녀가 지어준 것이었다.
"카페 이름이 해와 별과 바람의 시간인데 생각해 보니 달이 없잖아. 그러니 네가 달이 되렴."
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그 한마디로 인해 그날부터 달에게는 부를 이름이 생겼다. 세상에 단 한 사람, 나 혼자 이름도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불편하던지. 달은 사장이 직접 이름을 새겨 만들어준 앞치마를 두르며 짧지만 퍽 난감했던 그 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던 때였다. 갑자기 카운터 근처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직 준비도 다 못 마쳤는데 손님이 추가 주문을 하시려는 걸까. 차라리 계산하고 나가시는 거면 좋겠는데. 그런 못된 생각을 한 것이 잘못이었는지 달은 다음 순간 매우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달의 눈앞에서 손님이 털썩 주저앉아버린 것이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단순히 넘어진 것인지, 아니면 구급차라도 불러줘야 할 정도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건지. 달은 손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카운터를 넘어 손님에게로 향했다. 검은 정장 차림의 그는 아직도 나무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커피 먹고 안 좋아진 거라고 컴플레인 걸지는 않겠지? 이 시골 마을의 한적한 카페에서도 간혹 그런 진상 손님이 있는지라 걱정이 되는 바였다. 그러나 다행히 이 손님은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안색부터가 그러했다. 벽지 색보다도 새하얀 그의 얼굴이 정말이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잠을 잘 못 자는 편인지 눈도 좀 퀭해 보였고 무엇보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빨간 입술에서 더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역시 구급차를 불러야겠다. 그의 일행인듯한 손님들도 소리에 놀라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국아"
119에 연락하기 위해 달이 일어서려던 그 순간.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그가 달을 끌어당겼다. 하마터면 한 대 때리면 바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빼빼 마른 몸 위로 넘어질 뻔했지만 달은 있는 힘껏 순발력을 발휘하여 겨우 손님의 옆으로 쓰러지는 데에 성공했다. 위험한데 이게 무슨 짓이에요. 뭐라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지만 달은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 듣는 이름을 말하며 달을 쳐다보는 손님의 얼굴은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그런데도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마 아는 사람과 자신을 착각했고, 달의 심드렁한 반응에 그제야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린 거겠지. 달은 그 '국'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잠시 아는 척이라도 해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 손님은 이제 곧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장거리 운전에 지쳤던 건지... 제가 사람을 착각한 거 같네요."
재현은 최대한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남자의 텅 빈 호수처럼 무심한 눈빛을 바라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마치 확인 사살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인국을 지나치게 닮은 사람은 있을지라도 인국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잔인하고 확실한 현실을. 인국의 장례식을 직접 눈으로 목도했음에도, 한없이 가벼웠던 그의 관을 이 두 손으로 같이 들어 올렸음에도 믿고 싶지 않아 마음속 어딘가에서 인국을 찾아 헤매던 재현을 누군가가 비웃고 있는 듯했다. 재현의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다시 눈을 뜨기가 너무 힘겨웠다.
"아... 저기 손님 이거..."
달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가는 손님의 몸 상태를 유심히 살펴봤다. 멀리서 그의 일행들이 어딘가로 연락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반강제적으로 그에게 몸이 묶여 카운터 위 휴대폰을 가져올 수 없는 자신보다는 그들에게 조치를 맡기는 편이 낫겠지. 그렇게 생각한 달은 손님의 곁에서 떨어지려는 시도는 그만두고 대신 손님의 몸 상태를 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를 데려갈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는 여기에서 돌봐주어야만 했다. 그러다 달의 눈이 멈춘 곳은 손님의 팔목이었다. 손님의 가는 팔목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시곗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직전에 시계를 풀고 있다가 급하게 끼고 온 건지, 아니면 줄이 낡아서 풀어지고 있는 건지 아무튼 사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제법 가격대가 있어 보이는 고급 시계는 그의 가녀린 팔목 위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달랑거리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낡은 시계를 굳이 차고 다니는 걸 보면 제법 많이 아끼는 걸 텐데 정신없는 사이에 잃어버리면 얼마나 슬프겠나. 달은 팔을 뻗어 시곗줄을 다시 고정시켜주기 위해 손님의 시계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달의 손가락이 시계 본체에 닿는 그 순간,
파사삭!
시계에서 알 수 없는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마치 정전기처럼 따끔한 통증이 달의 손가락에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리에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강한 충격 또한 느껴졌다. 병원에서 깨어난 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물질이 침투하는 듯한 강렬한 감각이었다. 달은 반사적으로 시계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강렬한 잔상이 남았다. 그것은 무언가를 봤다는 감각이었다. 아주 짧았지만 강한 충격과 함께 달의 머릿속에 짧은 장면 몇 개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 어디였는지 구체적인 것은 여전히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엄청난 후회와 슬픔, 그리고 절박한 의지가 담긴 감정만은 달의 가슴속에 확실하게 스며들었다.
"달...이씨? 괜찮으세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달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도움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었던 그 남자는 이제 멀쩡하다 못해 오히려 달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시계와 달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것을 보면 아마 달이 목격했던 그 빛을 남자 역시 목격한 것 같았다.
"손님."
달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떨려왔으며 동시에 목은 타들어가듯이 말라 왔다. 방금 전 느꼈던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본인도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재현이 그렇게나 보기 힘들어했던 텅 빈 눈빛에는 강한 의문과 혼란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달은 자신이 왜 이 사람에게서 낯선 고통을 느꼈는지 왜 하필 이 사람의 낡은 시계에서 자신이 시선을 뗄 수가 없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그 강렬한 잔상 속에서 분명히 이 시계를 본 것 같았다. 정확히 이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비슷한 것을 보았다. 기억을 잃은 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확신이었다.
"혹시 저랑 아는 사이셨습니까?"
재현이 숨을 멈췄다. 당장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재현의 머리가 재현을 그렇게 두지 않았다.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방금 전까지 그를 보냈던 장례식장을 그렇게나 많이, 오래 생각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이 상황은 모두 미쳐버린 제가 만들어낸 끔찍한 환각이거나 아찔하고 잔혹한 우연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재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어떤 답도 그에게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손님은 제가 누구인지 아세요?"
그러나 달은 재현에게 다시 한번 질문했다. 마치 그의 회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아뇨, 처음 뵙습니다."
신음을 토해내듯 재현은 정답을 뱉어내었다. 이게 맞는 거겠지. 머리가 점점 아파졌다. 이제 대답을 모두 끝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렇게 달의 앞에서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이 재현을 잽싸게 잡아당겼다. 달의 튼실한 팔이 지탱해 준 덕분에 재현이 넘어지거나 휘청일 위험은 없었다. 대신 그는 이제 완벽하게 달의 통제 하에 들어가 있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역시 그는 인국이 아니었다. 인국이라면 재현을 이렇게 거칠게 다룰 리가 없었다. 재현의 눈빛을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겠지.
달은 재현과 그의 시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반응을 보았을 때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을 잃기 전의 달을 알고 있거나 그와 얽힌 적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시계의 비현실적인 반응과 그것을 통해 얻은 어떤 흔적 역시 비슷한 느낌을 달에게 전해주었다. 절대 이 남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 달은 간절함을 담아 재현의 가녀린 팔목을 붙잡았다. 시계는 다시 만져봐도 아까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대할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손님, 저는 기억을 잃었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라면 제가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부탁입니다. 저는 정말 제 기억을 찾고 싶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공백을 끝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재현은 당혹스러웠다. 인국과 같은 얼굴의 남자가 이유는 다를지언정 그때와 같은 긴박한 표정으로 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와는 달리 재현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그가 정말 인국이 아닐지언정 재현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국을 떠올릴 것이고, 그를 인국으로 착각하고 싶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었다. 재현은 벌을 받아야만 했다. 적어도 인국이 힘들었던 만큼은 그도 남은 생에서 고통받아야만 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자. 얼른 거절하고 도망가 버리자. 그렇게 결심했음에도 재현의 입에서는 어느덧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 나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재현의 그 한마디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많이 괴로웠던 모양이다. 나라면 오히려 모든 걸 잊은 채 살고 싶었을 텐데. 아니다, 그럼 너까지 모두 잊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역시 모든 기억을 안고 아픔에 몸부림치는 삶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재현은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강하게 세뇌했다. 딱 그의 기억이 되돌아올 때까지만. 그가 인국의 얼굴을 닮아서가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에서 도움이 필요한 안타까운 사람이라 도와주는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라면 저도 협조하죠."
그러자 남자가 재현을 향해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화번호 좀 주실래요? 여유로운 듯 가볍게 웃는 그 미소가 언젠가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재현이 인국에게 번호를 요구했을 때 그가 보여줬었던 표정과는 판이해 재현은 그가 정말 인국과는 다른 사람임을 또 한 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번호를 입력한 재현은 그 언젠가의 자신처럼 곧장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오는 인국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당장은 예정돼있는 일이 있어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번호를 손에 넣어서인지 재현의 말을 들은 남자는 그 말에 금방 수긍해 주었다. 이것으로 시간을 벌었다. 재현은 여전히 병원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저를 걱정하는 직원들을 애써 다독이며 도망치듯이 카페를 빠져나왔다. 다음에 그를 다시 만날 때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달은 그런 재현을 달리 쫓아 나오지 않고 가만히 카운터에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재현의 하얀 손목에 매달려 있는 손목시계가 이번에는 꽉 채워져 흔들림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6.
출장 업무는 재현이 미리 계획했던 것보다는 빨리 끝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현은 그 이후 자신이 어떤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클라이언트도 직원들도 제법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던 걸 보면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재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별다른 이상 없이 잘 해낸 듯했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재현은 출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장기 연차를 신청했다. 아직 바쁜 일들이 몇 건인가 남아있었지만 사무소의 직원들은 재현의 조금 늦은 휴가를 매우 반겼다. 특히 재현과 함께 출장에 동행했던 두 사람은 재현이 휴가에 대해 입을 떼자마자 잘 생각하셨다며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날의 일들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어지간히도 걱정이 되었던 건지 건강에 대한 적절한 충고도 중간중간 찔러 넣어주었다. 재현은 그 모든 말들을 감사하게 마음에 담아두었다.
재현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직 출장에서 가지고 돌아온 짐들을 풀지도 않은 채였다. 빈틈없이 꽉 매어져 있는 손목시계를 탁자에 올려둔 재현은 손목에 남은 끈 자국을 조심히 문지르며 생각했다. 남자가 제 손목에 있던 시계를 만졌을 때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이 시계에 언제 그런 조명 기능이 있었던가.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시계도 아니고 태엽으로 돌아가는 낡은 시계에 그런 기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남자도 재현도 분명히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남자는 재현과 달리 시계를 통해 다른 어떤 것을 더 보았다. 그는 기억의 잔상이라고 표현했지만 글쎄. 내용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차라리 시계 모서리로 맞는 바람에 기억의 일부가 돌아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남자는 재현에게도, 재현의 손목시계에도 맞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가봐야 알려나..."
깊게 숨을 들이 내쉰 재현이 시계 옆에 내려둔 폰을 들어 남자의 연락처를 검색했다. 달. 두 사람은 헤어질 때쯤이 되어서야 통성명을 했다. 혹시나 재현의 이름을 듣고 반응이 있을까 했지만 남자는 전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부모님이 좋은 이름을 지어 주셨네요, 하고 웃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늦어졌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재현은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었고, 짐은 그대로였으며, 아직 남자에게 언제쯤 방문하겠다는 연락조차 넣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연락은 내일로 미뤄야 할 듯했다. 한 손에는 차가운 얼음이 든 위스키를 들고 재현은 연락처 대신 캘린더를 열었다. 장기 휴가라지만 최대한 짧게 다녀오고 싶었다. 인국을 닮은 그를 오래 봐서 좋을 것이 없었다. 괜히 그리움만 짙어져 또 울고 싶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추태를 보이기는 좀 그랬다. 그러니 최단 시간 안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재현은 목표에 맞춰 일정표를 짜기 시작했다.
또로롱.
한창 계획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잠잠했던 재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연락이 올 사람이라곤 아직도 자신이 빠진 프로젝트를 어떻게든 진행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일 직원들뿐이리라. 이런 때는 잠 못 자는 것도 나쁘진 않지. 재현은 몹쓸 생각을 하면서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재현 씨."
그리고 매우 후회했다. 설마하니 그가 먼저 연락을 해올 줄은 몰랐고, 이 시간에 연락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카페 일도 있어서 일찍 자야 할 텐데. 왜 일어나있는 거냐고 물어보면 밤을 새울 작정이라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말이 툭 튀어나와 재현은 자기도 모르게 풋 하고 웃어버렸다.
"사장님한테 또 혼나실걸요?"
"아이 그 정도야 껌이죠."
고작 그 정도 시간 동안 본 것만으로 재현이 제법 익숙해졌는지 첫 만남과는 다르게 달은 제법 능구렁이 같은 면모를 보여왔다. 아님 원래가 이런 사람이었는데 근무 중이라고 나름 손님에게 예의를 지키고 있었던 걸까. 덕분에 재현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편하게 달과의 통화를 즐길 수가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인국과는 다른 구석이 눈에 보여 더 편했던 걸지도 몰랐다. 달은 인국에 비해 장난기가 더 많았고,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인국도 처음에는 그랬던 것도 같은데 언제쯤부터인가 바뀌었던 것 같다. 철이 들 즈음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다 재현은 문득 깨달았다. 인국이 성격이 바뀌게 된 건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의 겨울, 기어코 집안의 무거운 공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가출이라는 이름으로 도망 쳐버린 재현을 인국이 그 바다에서 데리고 돌아온 그때쯤부터였다. 그 추위를 많이 타는 인국이 매일 들고 다니던 핫팩 하나 챙기지 못하고 짝짝이 슬리퍼만 신은 채 재현을 찾으러 바다까지 왔던 그날. 펑펑 우는 재현을 토닥이며 자신은 언제나 재현의 편이며, 언제고 옆에 있어 주겠노라 자장가처럼 잔잔히 들려주던 그날 이후로 인국은 재현에게만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으며 조금 더 자상해졌던 것이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다 내 탓이었구나. 눈을 감지 않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의 검은 등을 떠올리며 재현은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재현 씨?"
"아... 죄송합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죠?"
"재현 씨가 이곳에 있는 동안 머물 숙소에 대해서요. 제 부탁으로 오시는 것이니만큼 저희 집에서 대접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는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낡은 원룸에서 살거든요. 저 혼자서도 겨우 누워 잘 자리가 있을 만큼 작은방이라 재현 씨를 차마 이런 곳에 모실 수는 없을 거 같아서요."
"저는 상관없어요."
"네?"
재현은 정말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누워봤자 재현이 잠들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워있으나 앉아있으나 재현에게는 매한가지였다. 정말 피곤하면 가끔 30분 정도씩 얕게 쪽잠 정도야 자겠지만 창문 밖의 파리가 날갯짓하는 소리에도 퍼뜩 깨버릴 것이 재현이었다. 매번 병원에서 타오는 수면제도 어느 순간부터는 내성이 생겨 말을 듣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똑같을 바에는 재현은 잠든 달의 얼굴이라도 보고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얘기를 달 본인이 들으면 상당히 부담스럽겠지만. 재현은 그렇게나마 인국과 닮은 그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안정을 찾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당연히 달은 손님을 그렇게 대접할 수는 없다며 반발했다. 하지만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는 결국 재현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자신의 원룸 주소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도착한 달의 원룸은 정말로 좁았다. 아버지가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그 시절, 어머니와 단둘이 머물렀던 원룸도 이것보다는 넓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이 정말 작아서..."
달은 정말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기까지 재현이 몇 번이고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했음에도 여전히 그는 재현이 이 좁은 원룸에서 고생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현은 전혀 고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이 좁은 방 어느 구석을 가도 재현을 졸졸 따라붙는 달에 웃음을 지은 재현은 캐리어를 대충 현관 근처에 밀어 넣고는 피곤하다는 듯 어깨를 축 내리며 달을 바라보았다.
"진짜 피곤하니까 이제 그만 해요... 저는 씻고 올게요."
달의 대답도 듣지 않은 재현이 멋대로 욕실에 들어갔다. 방과 마찬가지로 욕실도 제법 좁았지만 그래도 씻는 데에 별 무리는 없었다. 재현에게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머리를 감기 위해 샴푸를 짰을 때였다. 익숙한 향기에 놀라 통을 들여다보면 한때 인국이 주구장창 쓰던 그 샴푸가 욕실에 있었다. 이것도 기억해 보면 재현이 향기가 맘에 든다고 한 이후로 줄곧 쓴 거였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다행히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재현의 작은 울음소리는 간신히 묻을 수 있었다. 눈물은 세수와 함께 씻겨보냈다. 그러자 재현은 평소보다도 더 깊은 피곤을 느끼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가자 달이 그 좁은 공간에 이불을 가득 펼쳐놓은 것이 보였다. 평소에도 침대 없이 바닥에서 자는 모양이었다. 바통터치를 하듯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달 대신 재현이 그 이불 위로 빨려 들어가듯이 몸을 던졌다. 평소라면 머리를 말리고, 스킨로션을 챙기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는데 아주 무거운 저울추라도 매단 것 마냥 몸이 무거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인국이 냄새. 욕실에서도 맡았던 그 향과 비슷한 향이 이불에서도 배어 나왔다. 욕실에서는 좋아하는 노래인지 재현도 익히 알고 있는 팝송을 달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아... 진짜 졸리다. 재현은 3년 만에 그 어떤 다른 것의 도움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7.
아침 햇살이 방 안을 비췄을 때, 재현은 눈을 떴다. 개운함. 근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머릿속 안개가 걷히는 듯한 개운함이었다. 그는 습관처럼 손을 뻗어 약통을 찾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지 못해도 상관없다며 약을 한 알도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재현은 이불 위에 멍하니 주저앉았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단지 그를 닮은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에게서 나던 향과 똑같은 향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수면제나 명상도 해결하지 못했던 불면이 해소되었다니. 이게 말이 돼? 재현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이었다. 그는 바닥에 널려있던 이불들을 대충 치운 후 낡은 식탁에 쭈그려 앉아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 되게 잘 자던데요?"
달이 눈썹 한 쪽을 찡긋 올리며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코까지 골더라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이 든 것은 사실이었기에 재현은 얼굴만 붉게 물들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장난이에요. 걱정했는데 잘 잔 거 같으니 다행이네요."
달이 아까부터 썰고 있었던 오이 한 쪽과 쌈장을 건네며 말해왔다.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탓일까. 평소에는 쥐뿔만큼도 없었던 식욕이 샘솟아 올랐다. 이미 우적우적 오이를 씹고 있는 달을 잠시 쳐다본 재현은 그에게 건네받은 오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명쾌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정말 기분 좋았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재현은 망설임 없이 제 손목에 있던 낡은 손목시계를 달을 향해 내밀며 물었다.
"자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달 씨, 지금 뭔가 보이나요?"
"아뇨."
"그럼 그때는 어떤 걸 봤어요? 저는 하얀 빛이 시계에 피어오르는 걸 본 게 다예요. 달 씨는 뭔가 다른 걸 더 본 것 같던데."
"글쎄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머리가 잠깐 따끔했고, 푸른빛과 함께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게 아마 제 기억일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 둘이 본 게 제법 다르네요. 그럼... 혹시 모르니 달 씨가 한 번 더 접촉해 보시겠어요?"
재현은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달은 그런 재현을 흘끔 보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손을 뻗어 시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재현은 이 모든 과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제 손목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지잉!
이번에는 강렬한 충격 대신, 미세한 진동이 달의 손가락 끝으로 전달되었다. 달은 눈을 부릅떠보기도 하고 꼭 감아보기도 했지만 그때와 같은 감각은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미세한 진동마저 사라지기 시작하자 달과 재현은 시선을 마주쳤다.
"책을 좀 읽어봤는데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을 유지하던 재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 도서관에서 빌려온 기억상실과 관련된 몇 가지 책을 대출해 읽어왔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재현의 시선이 향했던 것은 어떤 한 책에 담겨있던 짧은 내용이었다. 그 책에는 기억상실 환자와 특정 물건과의 반복적인 접촉이 잠재의식 속 정보를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지금 그들의 상황과도 가장 유사한 접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달 씨가 당분간 저 대신 이 시계를 차고 생활해 보는 건 어때요?"
"... 괜찮겠습니까?"
달은 재현이 그 시계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자세한 사연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재현은 바늘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 시계를 굳이 매일같이 차고 다닐 정도로 시계에 대한 애착이 굉장했다. 씻을 때 말고는 딱히 벗고 있는 때도 없지 않을까? 한껏 낡아 너덜너덜해진 시계와 재현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달은 고민했다. 무엇에 고통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을 더 이상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자신으로 인한 거라면 더더욱.
"괜찮아요, 저한테는 더 이상 쓸모없는 도구이니까요. 그냥 손목이 좀 허전해서 하고 다닐 뿐이에요."
달은 재현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재현의 시선은 그 자신의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재현은 손을 뻗어 달이 제 시계를 가져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한 건 나이긴 했지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나를 도와줄까. 한 번 물어볼까 싶어 입을 달싹이던 달은 결국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시계만을 받아들였다. 어쩐지 재현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서워져서 그랬다. 대신 달은 쓸데없는 말을 한두 마디 주절주절 실없이 뱉어내는 것으로 그 불안함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찬 그 손목시계는 우연히도, 아주 우연히도 달의 손목에 꼭 들어맞았다. 절대 달이 쓰던 위치는 아니지만 하도 자주 써서 구멍이 커다랗게 벌어져 있던 한 군데, 그곳에 달은 재현의 손목시계를 고정시켰다.
8.
또다시 찾아온 어두운 밤, 재현은 오늘도 어김없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불면증이라는 말은 누가 했는가 싶을 정도 빠른 취침이었다. 대신 좁은 이불 안에서 재현과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누운 달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잠자리를 가리는 편도 아니고 옆에 누가 있다고 못 자는 성격도 아니고 피곤함이 덜한 하루인 것도 아니었으면서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두 눈덩이가 스르르 무겁게 내려가던 그때, 달은 꿈을 하나 꾸었다.
꿈속에서 달은 분명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의 귀를 통해 차갑고 거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흰 입김이 공기 중에 흩날리는 어느 추운 겨울날 밤이었다. 저 멀리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낡은 벤치에 누군가 홀로 앉아있는 게 보였다. 재현이었다. 귓불도, 콧방울도, 호호 불고 있는 손끝까지 모조리 빨갛게 물들인 재현은 무언가에 몹시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달이 한 걸음 재현을 향해 걸어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달의 뒷덜미를 잡아당겨 그의 진로를 방해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재현의 뒤에 다가왔다. 그는 재현의 잔뜩 움츠린 어깨에 두터운 코트를 덮어주었다. 코트 안쪽에는 언제 붙여놓은 것인지 따끈따끈한 핫팩이 여기저기 누더기 기운 것처럼 붙어있는 게 멀리서도 눈에 보였다. 재현은 그 따뜻함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재현의 앞에 나타난 이는 달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였다. 저 사람이 '국'이구나. 달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달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현과 인국은 아주 선명하게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현아, 나는 널 혼자 두지 않아. 네가 나를 믿는 한, 절대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잔뜩 실려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재현은 달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맑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달은 그 광경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마음 한편에서 의미도 모를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두 방울 또르르 넘쳐흘렀다. 왜 화를 내는지, 또 왜 울고 있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달은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것 같기도 했고, 다시 찾은 것 같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이 눈물을 닦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다시 들었을 때, 흰색의 섬광이 재현과 '국'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던 벤치를 덮쳤다. 파도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커졌고, 재현도 '국'도 달도 모두 그대로 깊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
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깼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옆에서는 여전히 재현이 안정적인 숨소리를 새근새근 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본 장면은 꿈이었던 것 같다. 금방 깨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꿈의 내용은 흩어진 조각들처럼 불분명했다. 하지만 달의 몸은 아직도 하얀 입김과 차가운 공기, 몰아치는 파도 소리의 감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달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혼자 두지 않아."
남자가 힘을 꾹꾹 실어 말했던 그 한마디만이 달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그것은 기억일까? 기억이라면 누구의 기억일까? 시계의 주인인 재현의 기억일까? 달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 꿈은 기억을 잃기 전의 달과도 관계가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꿈을 꾸는 것은 달이 아니라 재현이었어야 할 테니까.
"으으으....달 씨? 무슨 일이에요."
재현은 달이 꿈에서 깨어난 순간에서부터 한 박자 늦게 일어났다. 평소라면 어떤 작은 소리에도 반응했을 텐데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달이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는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가 시선을 내려 제 손에 차고 있는 재현의 손목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깼군요."
"그건 괜찮아요. 오히려 이렇게 깊게 잠든 게 오랜만인걸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꿈을 꿨습니다."
달은 잠시 망설였다. 요 며칠 새 친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자신이 꾼 비현실적인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안지 얼마 안 된 사람을 굳이 자신의 집에 데려와 기억을 찾는 것을 도와달라 간청한 것은 자신이었다. 심지어 꿈에는 이 사람이 나왔었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달은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재현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재현의 표정을 살피면서였다. 정말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것일지 아직도 그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국아..."
아니나 다를까. 달의 꿈 이야기를 들은 재현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달이 꾼 꿈은 재현과 '국'이라는 사람의 기억 그 자체였음이 분명했다. 문제는 이게 어떻게 달 자신과 연관이 되느냐였다. 달이 거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동안 무언가를 꼼지락거리고 있던 재현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밖으로 뛰어나갔다. 손에는 어느샌가 달이 차고 있던 재현의 시계가 들려있는 채였다.
"재현 씨!"
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져 가뜩이나 한밤중 한파 주의 문자가 날아왔던 추운 날씨에 겉옷 하나 걸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린 재현을 한 박자 늦게 패딩을 걸쳐 입은 달이 겨우 따라나섰다. 다행히 재현은 그렇게 멀리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달의 꿈에서도 나왔던 그 낡은 벤치 앞에 멈춰 서있었다. 이게 이렇게 가까운 데에 있었구나. 여러모로 놀란 달이 주변과 재현의 표정을 살피는 사이 재현은 이곳에서의 모든 추억을 다시 되새겨보고 있었다.
겨울 바다.
몸에 열이 많은 재현은 이 계절 바다의 차가운 공기를 아주 좋아했지만 겨울에 태어난 주제에 추위를 아주 많이 타던 인국은 그렇지 못했다. 인국은 언제나 뚱뚱한 패딩과 목도리, 귀마개, 장갑 따위로 중무장을 한 후에야 재현의 뒤를 무거운 걸음으로 뒤따라왔었다. 너는 무슨 바다를 맨날 여름도 아니고 겨울에 가자고 그러냐. 매번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대는 인국이었지만 그런데도 연이 끊기기 전까지의 그 많은 겨울 동안 재현의 겨울 바다 나들이에 인국이 동행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국이 떠나고 첫 겨울이 찾아온 후에야 재현은 그것이 인국이 자신을 너무도 사랑해서였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날은 재현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어떤 날은 재현을 즐겁게 하기 위해, 어떤 날은 재현의 답답함을 해소해주기 위해. 인국에게 있어 재현을 위해 그깟 추위를 견디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본인은 여행이 끝난 뒤에 반드시 길고 지독한 겨울 감기를 앓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재현은 그런 바보 같은 인국을 떠올렸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지키고 사랑해 주었던 사람.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자신은 그를 어떻게 대했던가. 재현은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3년 동안 억눌러왔던 슬픔이 모두 한꺼번에 폭발하였다. 그럴 자격이 없다 홀로 꾹꾹 눌러왔던 눈물 역시 댐이 붕괴되듯 터져 나왔다. 재현은 숨을 헐떡이며 그들의 추억이 가득했던 썩은 벤치의 손잡이를 붙잡고 무너져내렸다. 가만히 그를 지켜만 보고 있던 달은 재현의 갑작스러운 절규에 깜짝 놀랐다. 그는 재현의 격렬한 슬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신 그의 몸이 먼저 재현을 향해 반응했다. 달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재현의 등을 조심히 토닥이며 무심코 입을 열었다.
"또 운다, 안재현.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뭐 난다고 내가 그랬지?"
순간 무서울 정도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덮쳐왔다. 감정에 휩쓸려 펑펑 울고 있던 재현이 눈물을 닦는 것도 잊고, 고개를 돌려 달을 바라보았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충격이 그를 사로잡았다. 안 그래도 새하얀 그의 얼굴이 또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달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정확하게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재현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만은 느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재현이 넋이 나간 채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말투도 표정도 장난스러운 목소리도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 다정한 토닥임도. 모두 재현이 알고 있는 인국의 그것과 똑같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투성이지만. 그는 재현이 그렇게나 애타게 찾고 보고 싶어 했던 인국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제게, 아니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재현은 이제 거의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마치 영하의 겨울 바닷가에서 옷을 푹 적시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몸은 제어되지 않는 떨림을 보였다.
"재현 씨, 재현 씨 정신 차려봐요. 무슨 일이에요!!"
한편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대는 재현을 바라보는 달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분명 그가 무언가를 알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재현은 달에게 어떤 언급도 없이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야. 달은 재현이 제발 뭐라도 대답해 줬으면 하는 절박함에 그의 떨리는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재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달의 머릿속에서 어마어마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이전까지 경험했던 단순한 따끔함이나 희미한 빛 한 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압력이 그의 관자놀이를 짓눌렀고, 동시에 파편화된 기억의 이미지들이 물결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가출한 재현의 손을 꼭 붙잡고 떠났던 첫 여행, 매년 연례행사처럼 겨울만 되면 겨울 바다를 보러 가자 보채던 재현의 어린 얼굴, 결코 밝힐 수 없는 복잡한 제 사랑을 몰래 토해내던 낡은 노트, 턱시도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함께 사진을 찍자며 자신을 끌고 가던 유독 따뜻했던 그래서 더욱 잔혹했던 체온, 10년이 넘게 흘러도 여전히 아름다웠던 잠든 재현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꼈던 재현의 품 안에서 맡은 달큰한 복숭아 향의 향수.
"으윽!"
달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재현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꽉 주었다. 무방비하게 서 있다가 갑자기 그의 힘에 눌린 재현은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모래사장 쪽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그런 그를 무의식중에도 잡으려고 손을 뻗은 달 역시 재현의 옆에 픽 하고 쓰러지고야 말았다.
"달 씨 괜찮으세요?"
자기 자신도 머리 위에 모래더미를 잔뜩 엎어 쓴 주제에 남 걱정이나 해주고 있는 재현을 쳐다본 인국의 두 눈에서 달에게서는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그래서 내심 서러웠던 혼란과 고통, 그리고 낯선 애증이 담긴 눈빛이 가득 묻어 나왔다.
"안재현... 이 바보야."
잔뜩 일그러져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그 한마디에 겨우 멈춘 것만 같았던 재현의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달에게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이 다른 안도감이 재현을 감싸 안았다. 정말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던 그날로부터 3년 만에, 재현은 죽음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인국을 되찾은 것이었다.
9.
인국이 돌아왔다. 3년의 공백과 인국으로서의 시간이 한순간에 메워지며,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재현이 손에 들고 있던 시계가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가 부서지고 내부의 복잡한 부품들이 모래사장 위에 흩어졌으며 이를 쥐고 있었던 재현의 손도 유리 조각에 찔려 피를 뚝뚝 흘려댔다.
"너는 또 그걸 왜 꼭 쥐고 있어서...!!!"
인국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으로 재현의 손을 지혈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부품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시계를 고칠 수 있는 굉장한 수리공은 이 세상에는 없을 터였다. 그 말은 곧 인국이 앞으로 죽을 때까지 재현이 살아있는 이곳에 묶여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결말이네. 그는 생각했다. 적어도 이곳으로 오기 전 영원히 재현을 볼 수도 재현의 소식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던 그 시간들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 정도의 차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국은 2nnn년의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였다. 적어도 지금 이 세상을 기준으로 하면 그랬다. 재현의 결혼 이후 조용히 그의 곁을 떠난 인국은 백 살도 훌쩍 넘은 늙은이가 되어 검은 머리를 찾아보기도 힘들어질 나이가 되어서야 덮어두었던 재현의 소식을 찾아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재현 역시 나이를 먹어 인국이 사랑했던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검은 희망, 결혼은 하지 않았을지언정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으며 얻게 된 자만감. 인국이 그동안 애써 쌓아 올렸던 그것들은 일곱 밤을 기다리고 기다려 찾은 재현의 소식이 인국에게 전달되었을 때 모두 무참히 파괴되고야 말았다.
소식에 따르면 재현은 38살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워낙 오래된 일이었던지라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던 교통사고의 기록이 낡아빠진 경찰의 데이터베이스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즈음에 있었던 인국과 재현 두 사람의 겹지인이었던 어떤 이의 장례식 직후라고 했었다. 평소라면 그런 부류의 행사에서는 기본적으로 본인이 해야 할 도리만 적당히 하고 사라졌을 재현이 그날따라 오랫동안 장례식장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게 인국이었을 것임을 인국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인국은 결국 그곳에 가지 않았다. 재현의 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나고서도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보고 웃어 줄 용기가 없었던 탓이었다. 어색하게 만들어낸 스케줄과 위로의 문자, 그리고 소정의 마음을 지인의 계좌에 보내주고 나서 인국은 그 일을 그냥 깔끔하게 잊어버리기로 했었다. 그리고 인국이 그렇게 깨끗이 지워버린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어두운 터널 안에서 재현은 뺑소니 차량에 치인 채 홀로 차가운 바닥에 누워 생을 마감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인국은 절망했다. 비록 너를 떠나기는 했지만. 너 때문에 많이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네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기를 바란 것은 절대 아니었다. 행복한 너의 모습을 볼 자신은 없었지만 그런데도 내가 없는 어느 곳에서 사랑하는 부인과 이전부터 네가 원하던 토끼 같은 자식을 낳아 행복에 겨워 웃고만 있기를. 그래서 비겁하게 너를 떠나버린 내가 그래도 이 선택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후련하게 웃으며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심지어 인국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그의 죽음에 자신의 지분이 어느 정도 있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인국이 재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그날 장례식장에 나가 재현의 얼굴을 보고 왔다면. 그래서 재현이 평소와 같이 이른 귀가를 했었더라면. 모든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지나갈 때마다 인국은 자기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이라면 제발 돌이키고 싶어졌다. 그럴 때,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과거에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고 치부되었던, 그러나 한참 후 미래인 지금에 와서는 거금의 돈을 지불하기만 하면 결코 어렵지는 않게 경험할 수 있게 된 시간 여행 팸플릿을.
인국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재현의 생존. 그 외의 어떤 미래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그건 인국이 알 바가 아니었다. 비록 시간 여행에서 개인의 사정과 감정에 의한 과거의 변경은 금기시되는 사항이었을지라도. 그래서 시간을 재현이 죽기 직전이었던 바로 그 장례식 당일로 돌린 인국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누구보다도 먼저 장례식장에 도착해 재현이 올 때까지 대기하는 것이었다. 설마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인국은 차가운 도로의 바닥 한가운데에 누워 조금 전 따뜻하고 말랑했던 재현의 입술과 마주했던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훑어보았다. 안타깝게도 묻어 나오는 것은 철철 흐르고 있는 인국 자신의 피뿐이었다. 아마 이 정도의 부상은 이 시대의 의료기술로는 살릴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별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인국이 대신 죽은 덕분에 재현은 이제 살 수 있게 되었을 테니까. 마지막의 마지막에 결국 참지 못해 제 감정을 재현에게 드러낸 것이 유일한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그 정도는 재현이 이해해 줬으면 했다. 이제 곧 이 세상에서 사라질 감정이니 너도 곧 그런 친구도 있었지 하고 추억처럼 묻어둘 수 있을 거야, 재현아.
인국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겼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 여행자가 여행 중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것 같기는 하다. 살 만큼 산 늙은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설마하니 기계의 오류로 기억을 잃은 채 이 세계에서 계속 살 줄은 몰랐는데 역시 모험은 해보고 볼 일이었다.
그렇게 뿌듯함과 납득, 만족이 모두 담긴 미소를 짓고 있던 인국의 정신을 다시 깨운 것은 언제나 그렇듯 결국 재현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너 지금 네가 죽은 사람인 건 알고 있지?"
정작 가장 중요하고 의아한 부분을 모조리 다 대충 얼버무려 말했더니 제법 크게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미안해 재현아. 하지만 시간 여행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하는걸. 불문율은 죄다 어길 대로 어긴 주제에 이것만 챙기는 꼴이 제법 웃기기는 했지만 지금 가장 인국에게 달가운 결말에 다다른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다행히 재현은 앞으로 닥친 문제들에 정신이 팔려 더 이상 인국을 추궁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10.
"사장님 이제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래 꼴통, 겨우 살린 목숨이니 이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잘 살아!!"
그간 인국을 살뜰히 보살펴준 카페 사장에게 재현과 인국이 미리 입을 맞춰 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짐을 정리하고 올라오는 것으로 길고도 짧았던 인국의 방황 생활은 끝을 맞이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에 부모님은 버선발로 서울에 있는 재현의 집까지 달려왔다. 아, 나 이 세계에서도 불효자 되는 거야? 결국 부모님 두 분을 모두 떠나보내던 그날까지 손주는커녕 턱시도 입은 아들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조차 이뤄주지 못했던 이전 생을 떠올리며 인국은 괜히 뜨끔한 마음에 안겨 오는 어머니를 마주 안아주었다. 죽다 살아 돌아오더니 철이 좀 들었는가 보구나.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섞여 있어 인국은 상황도 잠시 잊고 펑펑 울 뻔했다.
인국의 신분 회복 절차는 의외로 제법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적극적으로 변호사를 선임하고 최대한 스케줄을 비워 모든 일정을 인국과 함께 소화해 준 재현의 도움이 있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이 영 그랬다 보니 재현이 그간 인국의 죽음에 죄책감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라고 인국은 생각했다. 그게 재현의 생각과는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어긋나있다는 것을 인국이 알게 되는 건 법원에서 그의 실종 선고를 취소해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완벽하게 돌아오게 된 이후였다. 신분도 회복했겠다 이제 곧 집도 구하고 작가 활동도 다시 시작하게 될 인국을 위해 두 사람은 둘만의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날과 같은 집에서 그날과 같은 안주, 위스키를 먹으며 둘은 한참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인국이 없는 동안 삐쩍 말라 당장이라도 말라죽을 가시나무처럼 살았던 재현은 그간 인국이 억지로라도 한 숟갈 더, 두 숟갈 더 하며 밥을 먹인 덕분에 제법 건강을 되찾았지만 역시나 오랜 세월 동안 건강에 해로운 생활을 한 것이 안 그래도 연약하던 몸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먹는 양이 이전보다도 훨씬 더 줄고 술에 취하는 속도는 그보다도 더 빨라져 있었다.
"아, 너 진짜 또 나 내버려 두고 혼자 눕지!"
그런 주제에 기쁜 날이랍시고 또 인국보다 빠르게 술을 꿀꺽꿀꺽 넘기던 재현은 그날보다도 훨씬 이른 시간에 위스키를 한 잔도 다 비우지 못하고는 잠시만 자겠다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하여간 그때랑 똑같은 건 예쁜 거 밖에 없어. 투덜대며 또 홀로 술을 비우던 인국은 곁눈으로 잠이 든 재현의 옆모습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키스는 괜히 했었나.'
딱 한 번, 입술을 맞댄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입술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인국은 꾹 참아야만 했다. 어떻게 예전처럼 돌아온 생활인데 내 욕심 하나로 겨우 안정을 찾은 재현을 뒤흔들겠는가. 인국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온몸의 물이 메마를 것 같을 때까지 울어대던 재현의 퉁퉁 불은 얼굴을 떠올리며 인국은 '참을 인' 자를 세 번 새겼다.
"나 이제 안 이뻐 보여?"
속절없이 술만 들이마시고 있던 그때, 조용했던 공간에 재현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인국이 술잔을 테이블에 놓고 소파에 있는 재현과 눈을 마주쳤을 때, 인국은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재현은 붉게 물들어 예쁜 그 눈가에 맑은 눈물방울을 똑똑 흘려대며 인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눈빛으로. 언제나 거울 속 인국 자신에게서만 볼 수 있던 욕망과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의외의 광경에 생각이 복잡해진 인국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재현은 다시 눈을 꼭 감고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허공을 향해 말을 던졌다.
"나도 너한테 못한 말 있는데... 안 들어 줄 거야?"
"어?"
"....국아, 나도 너 한 번만 안아봐도 돼?"
인국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네가 지금 나랑 같은 뜻으로 그 말을 하는 게 맞아?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인국의 몇십 년의 인생에서 재현이 단 한 순간이라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던 적은 없었다. 인국은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에게 유독 집착하고 의지하는 것도 이제껏 겪은 모든 일들이 트라우마처럼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국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래, 재현은 인국과 같은 또래의 남성이었다. 제아무리 남다른 일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 감정 하나 제대로 파악 못할 멍청이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것도 모든 일이 지난 지 몇 개월은 지난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것이라면. 사실상 재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일 터였다. 그러니까 진짜 안재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곱씹어 봐도 나오는 답은 같을 텐데 인국은 자꾸 스스로 똑같은 질문을 되물어봤다. 이렇게 행복한 결말이 정말로 현실인 게 맞냐고.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정말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한 짝사랑이 너무 길었던 탓이기도 했다. 다만, 이제는 좀 그 생각의 꼬리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재현의 눈꼬리가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삐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인국은 서둘러 재현이 누워있는 소파에 다가가 재현의 위로 최대한 조심히, 무게가 실리지 않게 앉았다. 그와 동시에 재현이 길고 가는 그의 두 팔을 인국을 향해 활짝 벌렸다. 심술로 빵빵하게 부풀린 두 볼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였다. 진짜 사랑스러워죽겠다. 인국은 참지 못하고 재현을 와락 안아버렸다. 단순한 사랑과 재회의 기쁨이 아닌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3년의 후회와 3년간의 고통, 그리고 수십 년의 엇갈린 마음을 모두 껴안는 행위였다. 인국은 어느 순간 재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울고 있었다. 정말 다행히도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인국과 재현은 서로를 품에 안고 천천히 좁아터진 소파 위로 누웠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안식. 그날 밤 재현은 3년 만에, 그리고 어쩌면 평생 동안 가장 완벽한 잠에 빠져들었다. 재현의 옆에는 더 이상 차가운 새벽 공기가 아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인국이 있었다. 재현의 두 발은 이날 이후로 더 이상 시릴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