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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닻
무청과 시래기

탁. 탁

흙 먼지를 털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소리에 아침 일찍 일어난 참새가 푸드득 날아간다. 낮게 깔린 안개가 오늘 날씨의 컨디션을 알려주었다. 이파리에 송글송글 맺힌 이슬들을 보면서 인국은 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무밭을 쭉 둘러봤다. 부모님때 부터 일궈온 만평의 서씨농장. 어릴때부터 부모님이 일궈오신 이 무밭에서 흙과 벌레를 친구삼아 뛰어놀았고, 제법 힘을 쓸 수 있던 중학생때부턴 일꾼들과 함께 수확을 완료한 무가 잔뜩 실린 콘테나를 옮기며 가업에 대한 책임감을 가졌다. 공부를 아주 잘하진 않아도 썩 하는 편이라 도내에서 제일 유명한 대학의 농업대학을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부모님의 무 농장으로 바로 들어와 영농후계자 등록, 지금까지 농사를 일궈왔다. 주먹구구식이었던 판매과정을 정리하였고, 임금구조도 개편하여 사업의 투명성을 강조하였다. 함께 일을 하시는 분들도 처음엔 여태까지 해왔던 루틴들이 깨지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오는 인국을 보며 설치고 다닌다고 눈을 흘겼으나 농사짓는 곳에서 보기 힘든 복지 제도를 맛보시고선 인국을 책임자로 인정해주었다. 

인국에겐 한가지 기준이 있었다. 이유가 있었는데 이 많은 농작물이 날씨, 사람, 컨디션에 따라 변하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농사는 운이 아니라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해서 인국의 루틴은 늘 똑같았다. 알람이 울리기전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구름의 방향, 바람의 세기와 습도를 체크했다. 아침은 늘 한 솥 끓인 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국의 종류는 때에 따라 달랐지만 기본적으로는 미역국이었다. 대충 그렇게 아침을 해결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밭으로 향한다. 가는길에  오늘의 할 일을 정리하고 밭에 도착해 전체를 점검한다. 만평을 다 돌 수 는 없어서 구역별로 나눠서 순환 점검을 한 후 무의 상태를 확인한다. 무의 이파리를 살펴보고 벌레나 냉해는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 보면 어느 덧 점심시간. 다시 집으로 들어가 대충 남은 반찬과 함께 밥을 챙겨 먹는다. 밥을 대충먹는 것 처럼 느껴지겠지만 가끔은 시장에 가서 백반을 사먹기도 한다. 오후에는 오전에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면 마저 정리를 한 후 오늘의 작황 상태를 기록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더 좋은 무를 키우기 위한 연구를 시작한다. 비료의 배합에 따라 무의 성장상태를 관찰하거나, 어떤 바람과 비를 맞으면 무가 어느정도로 자라는지에 대한 기록들을 꼼꼼하게 체크해둔다. 특히 인국이 키우는 천수무는 바람과 물이 아주 중요했다. 그나마 바람이 많다고 알려진 섬이라 바람양은 걱정없었다. 그렇게 연구까지 끝나면 하루가 금방 갔다. 마지막으로 밭을 둘러보고, 근처의 바다를 보며 한 숨 내쉬고 집으로 돌아가는 늘 똑같은 일상이었다. 인국은 이 루틴을 지루해하지 않았다. 맛있고 좋은 무를 키우기 위해서 늘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인국에게 최근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무를 수확하면 함께 나오는 무청의 처리 방법 때문이었는데, 대부분 남은 무청은 비료로 사용되지만 인국네는 무청을 말려 시래기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웬  시래기인가 싶겠지. 무청은 원래 부산물로 처리되어왔는데 시장의 시래기 국밥 사장님께서 염가에 판매해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선대 사장인 아버지께서는 어차피 남는거 싸게 넘겨주자 하였고, 처음엔 무청을 납품했었다. 그러다가 밭 한켠 바닷바람이 잘 드는 곳에 작게 건조장을 만들어 무청을 말려서 시래기로 납품하였다. 거창해 보이지만 그냥 무청을 널어서 말렸을 뿐, 별 다른 노하우는 없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시래기 납품처는 시래기 국밥집 한 곳. 그렇게 10년넘게 거래해왔고 농장 사업이 인국에게 넘어오면서 인국은 이 구조를 다시 생각했다. 처음엔 무청으로 받아가서 건조하시더니 이제는 건조도 서씨농장에서 하는데 판매가에 변동이 없었다니. 인국은 차라리 비료로 처리하는 비용이 인건비도 덜 들겠다 생각했다. 아니면 가격을 좀 올려받던가. 

  선대 사장님인 아버지와, 시장 시래기 국밥집 사장님과의  약속이어서 관행처럼 하고 있었으나 수익성이 나지 않아 안하느니만도 못한 사업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은 인국에게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셨고 인국은 직원을 통해 국밥집에 시래기 납품가 조정안을 전달했다. 

그게 어제 일 이었다.

 

-

바다를 보고 자란 사람들 중에는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바다를 견디는 사람도 있다. 재현은 후자였다. 집에서 나가면 바로 보이는 바다. 어디로 가도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섬의 경계가 어릴 때 부터 숨을 막히게 했다.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늘 가게이 있었고 끼니의 대부분은 시래기 국밥이었다. 어릴 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지만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는 지겨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삶이 계속 이어질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재현은 공부를 했다. 잘 해야만 나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육지로 나왔을 때 재현은 비로소 그 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바다냄새가 나지 않는 공기,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 자기 이야기를 아무도 묻지 않는 환경. 처음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단단했달까. 입사지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떨어졌다. 다시 쓰고, 다시 떨어졌다. 이유는 늘 애매했다. 경력이 부족하다는 말, 조금 더 맞는 자리가 있을거라는 말. 그 말들이 쌓이자 재현은 문제점을 자신에게서 찾기 시작했다. 점점 자신을 옭아매어 가고 있을 때 즈음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게가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이야기만 했다. 재현은 그 말을 듣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재현은 결국 섬으로 다시 돌아왔다.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패배감을 잔뜩 짊어지고서. 내가 여기로 돌아온건 끝까지 못버텨서라고. 처음엔 손이 어색했다. 국을 끓이고, 시래기를 손질하고, 손님과 눈을 마주치는 일들이 몸에 붙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부모님은 손님들께 은퇴의 이야기를 꺼냈고, 우리 아들이 이어받을거라며 재현을 소개시켜줬다. 어색하게 웃는 재현에게 손님들은 반가이 인사를 했다. 

"이 집 덕분에 밥먹고 살지."

손님들의 반응에 재현은 그날 밤 오래 잠들지 못했다. 이 섬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이 곳을 그냥 둘 수 없는 마음이 엉켜있었다. 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다시 나갈 수 있다는 여지를 마음에 두자. 더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가 올거야. 재현은 그렇게 버텼다.

그런 재현에게 어제 농가에서 온 소식은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시래기 납품가를 두배로 올린다는 말. 아직 국밥의 맛도 제대로 못내는데 재료값부터 오른다니. 재현은 낙담했다. 아니, 낙담할 시간이 없었다. 웬만한 일은 자신 탓으로 돌리던 재현도 시래기 값 인상은 본인 탓이 아니라는걸 알았다. 시간이 없었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인국의 사무실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 번, 그리고 조금 늦게 한번 더.

 

"네."

 

인국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 신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익숙한 발걸음이 아니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인국은 초면인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훤칠했지만 힘은 좀 없어보였다. 큰 키 치고는 자세가 낮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두 손은 앞에 겹쳐쥐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목소리는 또렸했지만, 끝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저.. 시래기 국밥집 사장 안재현 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앉으세요."

 

인국의 말에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앉으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려 애쓰는게 보였다. 주눅들어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재현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저.. 시래기 납품가 말인데요. 인상안을 다시한번만 검토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준비해 온 말 처럼. 하지만 외운 것 같지는 않은 말투였다. 인국은 서류를 정리해 착상위로 올렸다. 시래기 납품가 인상은 이미 정리된 일이고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인국이 말이 없자 재현이 입을 다시 열었다.

 

"이 동네 분들이요.. 바다 나가시는 분들, 밭일 하시는 분들, 하루벌어 하루 사시는 분들이 많고요.. 한끼 값이 크게 느껴지면 안오세요."

"...."

"재료값이 오르면 판매가도 수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저희는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국은 그 말을 들으며 재현의 손을 봤다. 무릎을 눌러 쥔 손. 힘이 들어가있었다. 키가 큰 사람이 스스로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기준을 바꾸긴 어려울 거 같아요."

".. 알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재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살짝 끌리는 소리가 났다. 저벅저벅 문으로 걸어가는 소리, 문을 여는 손은 조금 느렸다. 재현은 마지막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사무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인국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있었다. 서류를 다시보려다가 말고, 창 밖을 봤다. 무청이 널린 쪽이었다. 바람에 잎이 조금씩 흔들렸다. 

아까 재현이 숙였던 고개가 저 줄기처럼 겹쳐보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인국은 고개를 저었다. 아 생각하지말자. 혼잣말을 하며 서류를 다시 집어들었다. 이미 다 정리한 일 인걸. 그런데도 눈 감으면 조금 전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의 어깨선이 자꾸 떠올랐다. 

 

-

인국은 그 날 시장에 갈 계획이 없었다.

무 출하도 없었고, 거래처 약속도 없었다. 밭 일도 오전에 미리 정리해둔 상태였다. 그래서 점심 무렵, 인국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늘 하던대로였다. 숫자를 보고, 그 다음 순서를 정리하고, 불필요한 항목에 줄을 긋는일. 그런데 이상하게 집중이 잘 안됐다. 펜 끝이 자꾸 멈췄다. 이유를 붙이자면, 바람 때문이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평소보다 습했다. 무청을 말리기엔 애매한 날씨였다. 그게 신경쓰인다고 생각했다.

확인만 하고 오자.

인국은 그렇게 결론 냈다. 무엇을 확인하는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냥 트럭 키를 집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시장쪽으로 향했다.

시장은 늘 그랬다. 바다에서 막 들어온 생선냄새, 음식을 파는 냄새, 사람들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인국은 차를 세워놓고도 바로 내리지 않았다. 국밥집 간판을 한번 봤다가,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봤다. 그래, 밥 먹으러 온거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 치곤 설득력이 부족했다. 

 

"어서오세요!"

 

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국은 안으로 들어서며 잠깐 멈췄다. 어제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고 손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앞치마 끈이 허리에 단단히 묶여있었다. 저런 얼굴도 있네. 인국은 일부러 눈에띄지 않게 구석 자리에 앉았다. 재현이 물과 김치를 내오면서 말했다.

 

"저희는 시래기 국밥만 해요."

"하나 주세요."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인국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키가 커서 천장과의 간격이 좁아보였다. 수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셋팅하고선 석박지를 집었다. 무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인국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 무...

썩 괜찮았다. 인국이 무 맛을 음미하고 있는 동안 뚝배기에 시래기 국밥이 담겨 나왔다. 한 술 떠먹어보니 시래기는 질기지 않았고 국물은 튀지 않았다.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인국은 벽을 쳐다봤다. [시래기 국밥 6,000원]. 이 가격에?. 속으로 계산이 시작됐다. 시래기 양, 고기 양, 조리 원가, 손이 가는 정도. 남을리가 없었다. 그때 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맛 없으세요?"

 

재현의 말에 인국은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다."

"늘 이렇게 똑같이 만드시나요?"

"목표죠."

"목표요?"

"네. 매일 같은 맛."

 

재현은 인국에게 살풋 웃어보였다. 돌아서는 재현의 뒤로 옆테이블 손님들의 말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맛이 영 예전만 못해."

"그래도 엊그젠 맛있던데."

"떼잉.. 쯧. 이 가격에 먹을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오긴 하지만."

"사장이 바뀌었으니 별 수 있나."

 

손님의 평가는 중요하다. 인국은 그 이야기를 듣고선 시래기 국밥의 맛이 일정치 않나? 하는 의문을 얻었다. 내가 납품하는 시래기로 시래기 국밥을 만드는데 맛이 일정치가 않다? 인국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인국은 맛 확인을 위해 다음날도 점심을 국밥집에서 해결했다. 이틀 연속으로 등장한 인국의 얼굴을 알아본 재현은 반갑게 맞이했다. 어제와 똑같은 석박지와 뚝배기에 담긴 시래기 국밥이 인국 앞에 놓였다. 시래기를 한 숟갈 퍼서 먹어보았다. 어제보다 살짝 더 아삭한 식감이었다. 인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테이블, 뒷테이블의 국밥에 시래기가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시래기가 국밥 맛을 좌우하는구나. 인국은 서둘러 국밥을 말아먹고 국밥집을 나섰다.

 

다음날 아침, 인국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밭으로 나갔다. 무 상태를 보는 순서는 같았다. 구역을 돌며 잎을 확인하고 뿌리를 살폈다. 무를 뽑고 무청을 분리하는 순간 인국의 손이 잠깐 멈췄다.

무청을 한번 더 봤다.

줄기가 너무 굵지 않았고 잎맥이 고르게 퍼져있었다. 색도 나쁘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냥 퇴비용 더미로 던졌을 무청이었다. 이건 괜찮은데?. 혼잣말이 나왔다. 인국은 무청을 따로 빼두었다. 원래 시래기용으로 정해둔 양 보다 조금 더 많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확인이 되겠다. 확인은 인국이 가장 좋아하는 행위였다. 무청을 건조장으로 옮기면서도 평소와는 달랐다. 무청을 툭툭 던지지 않고, 간격을 두고 널었다. 바람 방향을 보고 햇빛이 오래 닿는쪽을 골랐다. 괜히 한번 더 정렬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인부가 말했다.

 

"사장님, 무청에 뭐 신경쓰실 거 있어요?"

"...이번껀 상태가 좋아서요."

 

대답을 망설이다가 입을 뗀 인국은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도록 평소 말투와 같이 말했다.

 

점심을 일찍먹은 인국은 건조장을 다시 찾았다. 보통은 아침에 널어두면 저녁에 한번 더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세번 째 였다. 바람이 바뀌었는지, 습기가 차는지, 잎 끝이 말리는 속도가 어떤지. 이정도면 괜찮겠는데?.

해 질 무렵, 인국은 다시 건조장에 갔다. 바다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무청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 풍경을 보고 인국은 잠깐 멈췄다. 바짝 잘 마르게 해주세요. 맛있는 시래기 국밥을 만들 수 있게 해주세요. 거기까지 생각한 인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기록을 남겼다. [무청 건조- 오늘 상태 양호. 기존 방식보다 간격 넓게, 다음에도 동일조건 진행] 인국은 일주일 내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시래기를 바싹 말렸다.

 

 

-

재현은 시래기를 집어들자마자 알았다. 말리다 만 듯한 눅눅함이 없었다. 손으로 쥐었을 때 부서지는 소리도 적당했고 잎맥이 고르게 살아있었다. 평소같으면 한번 더 고르고, 질긴건 과감하게 버렸을 시래기였다. 

 

​"이상하네.."

 

혼잣말이 나왔다. 재현은 시래기를 한 줄 더 집어들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풋내가 거의 없었다. 대신 구수한 향이 먼저 올라왔다. 오늘 상태가 왜이렇게 좋지?. 납품된 박스를 다시 봤다. 늘 보던 박스였다. 포장도 같고 수량도 같았다. 달라진건 내용물 뿐이었다. 기분탓인가? 재현은 잠깐 멈춰서서 생각하다가 다시 몸을 바삐 움직였다.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된장을 풀고, 고기를 넣고, 시래기를 넣었다. 불 세기도 바꾸지 않았다. 레시피는 그대로였다. 바뀌면 언되는게 국밥이었다. 그런데 국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재현은 다시한번 솥을 내려다 봤다. 향이 튀지 않았다, 국물 색이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육안으로도 시래기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재현이 생각하는 와중에 손님이 들어왔다. 국밥 하나. 손님의 주문을 받은 재현이 시래기 국밥을 한소끔 더 끓여 내왔다.

 

"오늘 국 괜찮네."

 

손님의 말에 재현이 웃으며 늘 괜찮지 않았냐고 대꾸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계산중이었다. 두번째 손님, 세번째 손님. 반응은 비슷했다. 아주 크지도 과하지도 않은 반응. 재현이 국밥집을 맡고 난 이후로 처음 있는 반응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한가해졌을때 재현은 다시 시래기를 봤다. 물에 불려놓은 시래기가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꺼내서 한번 더 씹어봤다.

질기지 않았다.

향이 죽지 않았다.

 

"이럴 수 가 있나."

 

재현은 인국의 얼굴을 떠올렸다. 국밥집에서 물마시던 그 얼굴. 아니 이 얼굴이 왜 떠오르지. 무청은 그냥 무청이다. 오늘 질이 좋은건, 날씨가 좋아서 일 수 도 있고, 바람이 잘 들어서일 수 도 있었다. 어제 비가 안와서 그랬을 수 도 있고.

저녁장사를 마칠 즈음, 재현은 박스 하나 더 열었다. 남은 시래기를 손으로 정리하면서 이정도의 시래기 질이면 국밥도 맛있게 끓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럼 손님들에게 일정한 맛을 제공할 수 있을것이고 장사도 안정적일 것이다. 재현은 갑자기 달라진 무청의 질이 궁금해졌다. 뭘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왜 이런지. 그래서 다음날 가게 문을 조금 일찍 닫았다. 

집으로 가는 길과는 반대였다. 괜한 행동을 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몇 번이고 스쳤지만 그럴때 마다 국밥 맛이 떠올랐다. 이번엔 분명히 달랐어. 그건 감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인국의 밭에 도착했을 땐 해가 이미 기울어 있었다. 무청이 널린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다쪽이었다. 재현은 그 풍경을 잠깐 보고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앞에 서있는 인국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장화를 벗지 않은 채 였다. 흙 묻은 손으로 서류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린 인국이 재현을 알아봤다.

 

"어?"

 

놀란 반응이 먼저 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무청이요. 뭐 바꾸셨나 해서요."

 

인국의 손이 멈췄다. 재현을 한번 봤다가, 책상위에 놓인 서류를 봤다가, 다시 재현을 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오늘 국밥이요, 맛이 달라졌어요."

 

그 말에 인국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라기엔 너무 작았다. 인국의 연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기분 탓인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매일 만져요. 매일 썰고, 매일 삶고, 매일 넣어요. 제가 모를 수 가 없죠."

 

재현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가 스스로 멈췄다. 인국은 재현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건조 기준을 조금 맞췄습니다."

"왜요?"

 

그 질문이 튀어나온 순간 재현은 스스로 놀랐다. 따지는 말 처럼 들렸을까 싶었지만 인국은 별 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시래기가 들쭉날쭉하면 국밥이 매번 달라지니까요."

"그건.."

"국밥이 매일 같은 맛이 나는게 목표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요?"

"그럼 재료도 같아야죠. 그래서 건조 방법을 연구하여 바꿔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이 방법대로 건조할 생각입니다. 시래기의 맛이 일정해야 국밥맛도 일정해질거고."

"국밥은 제 일인데요"

"그 국밥의 맛을 좌우하는 시래기를 납품하는게 제가 하는 일이거든요."

 

인국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창 밖으로 무청이 널린 쪽을 가리켰다. 재현은 인국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쳐다봤다. 바람에 무청이 일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정리된 풍경이었다. 풍경을 잠시 쳐다보다가 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시래기 납품가는 그래서 어떻게..."

"정가로 받겠습니다. 그래야 거래가 계속 될 거 같거든요."

 

재현은 잠깐 인국을 쳐다보았다가 웃었다.

 

"그게 낫네요."

"네?"

"또 터무니없이 저렴하면 나중에 또 거래 끊는다 할 거 같아서요."

 

재현의 웃음은 가벼웠지만 말은 무거웠다. 인국은 그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두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합의는 끝났다. 서류도, 계약서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확실했다. 재현은 사무실을 나서다가 문 앞에 멈춰서선 다시 몸을 돌려 인국을 바라봤다.

 

​"사장님."

"네."

"시래기.. 감사합니다."

 

재현의 작은 목소리에 인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비는 예고없이 왔다. 

아침까지는 괜찮았다. 하늘은 흐렸지만 바람은 안정적이었고 습도도 기준 안이었다. 인국은 무청을 널어두고도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정도면 오후까지는 버틸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잠깐 사무실로 들어간 사이 달라진 공기는 바다쪽에서 몰려온 구름이 밭 위로 내려앉았다. 무청 위로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인국은 재빠르게 나와 인부들을 불렀다. 밭에 남아있던 인부들이 빠르게 건조장으로 이동했다. 널어둔 무청을 걷어 들이는 손길이 빨라졌다. 비는 점점 굵어졌고 바람 방향도 바뀌었다. 그 때 트럭 한대가 밭 입구에 멈췄다. 인국의 눈길도 차를 향했다. 재현이었다.

우산도 없이 뛰어내려왔다. 얇은 점퍼를 걸치고 있었고 바짓단이 이미 젖어있었다.

 

"비 온다길래.. 혹시 아직 널어두셨을까봐요."

"아, 방금 막 걷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재현은 말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무청쪽으로 다가왔다. 인국은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말했지만 재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쓰는거잖아요."

 

인국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무청 한 다발을 들어 재현에게 건넸다. 무청을 받아드는 재현과 인국의 손이 스쳤다. 

 

"이건 오늘 못쓰겠네요."

"비 맞으면 끝이니까요."

 

인국과 인부들의 빠른 손놀림으로 무청은 순식간에 옮겨졌다. 야속하게도 그 사이에 비가 그쳤다. 소나기였다. 하지만 무청은 이미 충분히 젖어있었다. 인부들은 젖은 옷을 말리러 사무실로 들어갔고 밭에는 인국과 재현만 남았다. 젖은 무청더미 앞에서 둘은 잠시 서있었다.

 

"바다 쪽에서 말리면 바람은 더 좋은데.. 비만 없으면요."

"그쪽 건조장은.. 써본적이 없어서. 다음엔 그쪽으로 옮길까요?"

"아니에요. 괜히 일 만 늘리는 것 같아서."

"아닙니다. 거기서 한번 말려보는게 좋겠어요."

 

인국의 말에 재현의 눈이 반짝 빛난거 같았다. 일정한 바람을 맞은 시래기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 부터 들은 재현이었기 때문에 그 건조방식을 재현할 수 있단 생각에 기대감이 커졌다. 맛 좋은 시래기를 만드는 것이 이렇게 신이날까. 인국은 생각했다. 늘 하던 기준안에서는 건조장을 옮기는 일 같은건 굳이 시도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하지만 재현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비만 피할수 있다면 바다쪽 건조장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

 

비가 그친 다음날 공기가 달라졌다. 아침바다는 유난히 투명했고 파도는 낮게 부서졌다. 인국은 밭을 한 바퀴 돌고 나서 트럭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바다쪽 건조장. 어제 재현이 말했던 곳이었다. 20분쯤 달리고서야 도착했는데 인국의 트럭을 알아본 재현이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런 재현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한 인국은 애써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재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바람은 괜찮네요."

"여기는 늘 이렇더라구요."

 

재현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윽고 말없이 무청을 옮겼다. 인국이 먼저 널 자리를 정했고, 재현이 그 옆에서 간격을 맞췄다. 줄에 무청을 매달고 겹치지 않게 조정했다. 이정도면 괜찮겠죠?. 재현의 물음에 인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짝 물러서서 전체를 봤다. 바람도 일정했고 햇볕도 고르게 닿았다. 손발이 꽤 잘맞아 작업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무청은 바다 바람을 타고 일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둘은 조금 떨어져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국밥집에서는 이런 바람 잘 못 느껴요."

 

재현은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가 천천히 밀려왔다 밀려갔다. 인국이 그 옆에서 같은방향을 바라봤다. 건조장에 남겨진 무청은 바람에 흔들리며 마르고 있었다.

 

 

-

인국은 점심시간을 조금 비켜 국밥집으로 갔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다. 밭에서 확인할게 하나 더 생겼고 그게 생각보다 길어졌다. 일을 마치고 보니 시간이 애매했지만 잠시 고민하다가 트럭 핸들을 틀었다. 국밥집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어서오세요."

 

재현은 주방쪽을 나오며 말했다가 인국을 보고 말을 멈췄다. 반가운건지 당황한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국밥 하나 주세요."

 

재현은 인국 앞에 물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인국은 테이블 위의 석박지 그릇을 보았다. 평소보다 색이 조금 옅었다. 무는 큼직했고, 결이 고왔다. 인국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한입. 그리고 천천히 씹었다. 재현은 그 모습을 주방쪽에서 봤다. 인국의 표정은 늘 읽기 어려웠다.

국밥이 나왔다. 인국은 국부터 한 숟갈 떴다. 그 다음 석박지를 집었다. 이번엔 재현이 일부러 가까이 서있었다.

 

​"어떠세요?"

"뭐가요?"

​"석박지요."

 

재현의 말에 인국은 씹던걸 삼키고 말했다.

 

"괜찮네요."

"... 그냥 괜찮아요?"

"네."

"전이랑 비교해서요?"

 

재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인국은 다시 석박지를 집어 한입 먹었다. 그리고 그제야 말했다.

 

"무가 좋네요."

 

그게 끝이었다. 재현은 할 말을 잃었다.

 

"... 그게 다에요?"

"네."

 

인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하고, 물이 많지 않습니다. 양념이 무를 덮지 않네요. 천수무인가요? 우리도 천수무를 재배하는데."

"맞아요. 천수무. 사장님네 무에요. 지난번에 밭에 갔다가 직거래로 사왔어요. 무 맛은 기가막히게 알아맞추시네요."

"저희 무 이니까요."

"시래기는 어떠세요?"

"좋네요."

"사장님 진짜.. 칭찬 못하시네요."

 

재현이 샐쭉 하며 웃었다. 인국은 그런 재현의 표정을 보고 석박지를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역시 천수무였다. 석박지의 양념 맛이 절묘하게 맞아들었다. 시래기의 익힘 정도가 좋았다. 푹 익은 시래기의 질감이 고루 씹혀 삼킬때 부드러웠다. 그 모든걸 종합해 좋다고 밖에 표현 못하는 인국이었다. 

인국은 국밥을 다 먹고 계산대 앞으로 갔다. 카드를 건네며 인국이 말했다.

 

"이 무로 석박지 계속 쓰셔도 될 거 같습니다."

"그 말 허락같네요."

"아닙니다. 그냥.. 좋다는 말을 하고싶어서요."

 

인국은 그렇게 말하고 문을 나섰다. 재현은 계산대에 서서 한참을 서있었다. 대단한 말은 없었지만 괜히 석박지가 잘 된 거 같아 뿌듯했다. 주방으로 돌아가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석박지 냄새를 맡으니 매콤하고 새콤한 향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진짜.. 사람 힘 빼는데는 도사네."

 

좋다는건지 아니라는건지. 좋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재현은 그런 기대를 했다는 자신의 모습에 살짝 놀랬고 머리를 붕붕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

인국과 시래기를 함께 말리면서 알고 지낸지 한달이 지났다. 시래기 국밥의 맛은 안정화 되었고 단골 손님들도 어머니의 맛이 난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매사 자신이 없던 재현이 자신감을 얻게 된것도 이 것 때문이었다. 인국이 자신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다면 이런 뿌듯함을 얻을 수 있었을까. 섬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성취감을 얻었다. 성취감이라. 재현에겐 두번다시 오지 않을것 같은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해 준 인국에게 고맙다고 말을 해야할지.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상으로 쉬게 해 줄 겸 재현은 국밥집 문을 조금 일찍 닫았다. 내일 쓸 시래기와 석박지도 다 준비해놓았다. 문단속을 하고 재현은 집 가는 방향이 아닌 바다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밤에는 세찬 바닷바람이 재현의 얼굴을 스쳤다. 

건조장은 조용했다. 파도소리 말고 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재현은 무청이 널려있던 자리를 보았다. 이미 다 걷힌 상태였는데 바람의 방향이 무청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안재현씨?"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재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인국이었다. 작업복 차림 그대로였다.

 

"사장님? 여긴 왜...?"

"... 무청을 보러...."

"무청 다 걷었잖아요."

"...아 그게 아니라... 건조장 상황을 보러.."

 

재현은 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인국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둘은 잠깐 어색하게 서있다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역시 바다쪽이 바람이 훨씬 좋네요. 풍량이 달라요."

"그렇죠."

"근데요."

 

재현이 말을 이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까지 신경써주시는 거에요?"

 

인국은 그 말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이니까요. 늘 하던 대답이었다. 재현은 그 말을 듣고 눈 둘 곳이 없어 그저 바다만 바라봤다. 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사장님 기준에 일 에는.. 사람도 포함돼요?"

 

재현이 천천히 말했다. 그 질문은 가볍게 던진 것 같지만 공기는 무거워졌다. 인국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발짝 옮겼다. 재현의 옆으로 조금더 다가왔다.

 

"포함되죠."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왔다. 재현이 대답했다.

 

"그래도 되나요?"

"그러니 같이 일 했잖아요."

"같이..?"

"무청은 혼자 말릴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인국의 말에 재현이 몸을 돌려 인국을 쳐다봤다. 인국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사장님."

​"네."

"저요, 사람 도움받는거 잘 못해요. 근데요. 사장님은 좀 이상해요."

"어떤점이요?"

"도와준다는 말도 안하고 그냥 옆에 있는데 어느새 도움을 받고 있어서요."

 

인국은 재현을 쳐다봤다. 재현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필요해 보였거든요."

"그렇다고 막 도움주면 안되죠."

"그래서 같이 했잖아요. 일을."

 

재현은 순간 웃음이 났다. 그래, 나는 도움을 받은게 아니고, 우리는 일을 했다.

 

"저요, 이제 시래기 보면 시래기 보다 사람이 먼저 보여요."

 

그 말이 끝나자 바람이 멈췄다. 인국은 아무 말 없이 재현을 봤다.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았다. 

 

"저도, 무청 먼저 봐야 하는데요."

 

인국이 덤덤하게 말했다.

 

"요즘 안그렇습니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지금... 그 말도 일이에요?"

"예외입니다."

 

그의 대답에 재현은 웃었다.

둘은 다시 바다를 봤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그런데도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파도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움직였고, 바람은 여전히 바다쪽에서 불어왔다. 다만 이제 둘 다 알고 있었다. 이젠 일이 아니고 연애라는걸.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인국은 무 밭에 있을거고 재현은 국밥집에 있을것이다. 겉모습은 어제와 똑같이.

하지만 그 안은 완전히 달라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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