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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冬春傳 : 동춘전


사락-

사락-

사락-


 

잠결에 들리는 낯선 이명은 예사 것이 아님을 직감하게 했다. 간밤 통 잠이 들지 못하여 눈을 감고 설치는 걸 낭군의 수기(水氣)에 기대어 겨우 잠든 것이 기어코 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잠을 계속 설칠까 고심초사하는 낭군의 품 안이었다. 인국의 수기가 여전히 강건하건만 도림원(桃林園)의 복사나무들이 수산했다. 가만히 잠든 인국의 수기를 조금 빌려 도림원의 아주 먼 곳의 기운들까지 더듬어가며 기운을 살피다 조심스레 낭군의 품에서 벗어난 현은 혹여 인국이 깰까 비단의 끝자락들을 손에 쥐고 소리를 죽여 나와 대청에 발을 디뎠다. 왜 그러는 것이니. 도림원의 나무들에 물어도 진정되지 않는 낯선 이명들이 스산하기까지 했다. 늘 선선한 바람이 불어 마음의 안정을 주던 대청의 아래 공기도 어쩐지 시린 느낌이 들어 대청에서 내려와 신을 신고 급히 사당으로 향했다. 


 

사락-

사락-

사락-


 

마치 현의 그림자를 따라오듯 계속하여 들리는 이명, 소란스러운 복사꽃 꽃잎, 시린 공기. 발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사당은 평소와 같았다. 청룡의 수기를 더해 빚은 복사주는 제단 위에서 제 투명함을 자랑하며 찰랑이고 온 심을 다하여 기도드린 기운은 여전히 영험하니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사당 밖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복사나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야. 그 이명은... 이명..."


 

현은 복사나무에 손을 대고 심호흡했다. 언젠가부터 사라진 이명은 언제 괴롭혔냐는 듯 차가운 공기를 모두 거두고 도림원에서 사라졌다. 복사나무는 어째서인지 침묵했고 현은 차분히 복사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만물의 기운이 흘러들어 별이 뜬 태초의 류진국(流辰國)에 복사나무가 꽃을 피운 이후 처음으로 복사나무는 도림원의 주인에게 침묵했다. 그 침묵은 연유를 알아내야 하는 것 또한 저 자신의 숙명이라는 걸 잘 아는 현은 복사나무의 거친 나뭇결을 쓰다듬다 이내 다시 사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투명하지만 부정을 탄 복사주를 퇴줏그릇에 따라 버리고 다시 제단에 올리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예지 없이 다가온 기운, 침묵하는 복사나무, 기묘한 기운이 사라진 후 어째서인지 온도가 낮아진 도림원에 흐르는 낭군의 수기. 모든 게 하늘의 뜻이거늘. 현은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가늠하지 못 하는 하늘의 뜻에 감히 청하나니 무탈하기를. 류진국의 모든 것에 평안이 지속되기를.


 


 


 

"내가 먼저 갈 것이다!"

"오라버니는 복사나무가 웃는 게 안 들려? 수기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는 정이 너는 나만큼 수기를 다룰 수는 있고?"

"흥, 이곳 도림원에서 나를 이길 수는 있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현이 미소 지었다. 맑은 기운들이 짓궂게 서로 앞다퉈 달려오자 복사나무도 함께 부산스럽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동쪽의 청룡과 도림원 주인의 기운이 만나니 하늘도 감복하여 삼신과 함께 영험한 선물을 점지해주었다. 일각(一刻) 이르게 난 남자아이에게는 복사나무의 기운을 품은 청룡을, 일각 뒤 따라 난 여자아이에게는 동쪽 바다의 수기를 담은 복사나무를. 류진국의 모든 만물은 하늘의 축복이라며 하늘과 도림원을 우러러보았고 복사나무 금줄에 나란히 걸린 홍고추와 복사나무의 열매 아래 류진국의 축복이 가득 쌓였다. 해산을 한 후 두 아이의 탄생을 하늘에 고하는 제를 올린 그날 현은 인국에게 말했다. 기도를 드리던 어느 어슴푸레한 시각, 정이 천기를 거슬러 자신을 만나러 왔었다고 그리고 훈은 아버지를 만나러 갔었다는 이야기를 정에게 들었다고. 기억나는 게 없어? 달빛 아래, 품에 안겨 현이 물어오자 인국은 오래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오래 전 제 앞에 나타났던 수기를 잔뜩 품은 어린 도깨비가 생각났다.


 

'도림원의 후계 말이다, 복사나무 꽃과 열매처럼 붉고 희고 절색이더라. 나중에 보면 알 거야.'

'너는 도깨비 주제에 복사나무가 지천으로 깔린 도림원은 어찌 간 것이냐?'

'내가 도깨비라고 얘기한 적이 있나? 내가 도깨비인 줄은 어찌 알고 도깨비란 것인지.'


 

그러고 신기루 같이 사라졌던 어린 도깨비. 고약하게 말장난을 늘어뜨리고 간 도깨비의 입매가 저를 닮은 것이라니, 장난이 고약한 것을 누굴 탓할까. 발칙하게 도림원 주인의 절색을 자랑하며 사라지기까지. 인국은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니 기침하듯 웃음을 뱉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내저으며 달빛에 빛나는 제 짝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도깨비를 만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훈인가 보다. 도깨비라니? 장난기 가득한 귀여운 도깨비가 하나 있었어. 그게 무슨... 인국은 류진국에 있는 그 어떤 복사나무 열매보다도 단 절색의 입술을 입에 머금으며 궁금해하는 현의 말을 웃으며 제 숨으로 덮었다. 훈이 장성한 후 아버지를 찾아와 놀린 것을 단단히 혼내주리라 생각하며. 하지만 훈이 녀석 현의 절색을 진심으로 자랑하러 온 것이라니 또 그것 하나는 칭찬을 해주겠다 다짐했다.

훈과 정이 글자를 깨우치고 넘실거리는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올해는 처음으로 두 아이를 동쪽의 서가로 보내는 날이었다. 혼인을 한 후 신월(申月)에는 낭군과 함께 동쪽 서가를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함께 지켜왔지만 하늘과 삼신의 점지 그리고 해산까지, 그 후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까지 여의찮아 늘 인국 혼자 동쪽의 수기를 다스리기 위해 신월에 다녀오는 정도였고 올해는 모두 함께 찾아뵙기로 했건만 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바람에 나부끼는 복사꽃 꽃잎을 바라보며 인국에게 말했다.


 

"신월에 함께 찾아뵙기로 하였는데 올해도 그러지 못해 미안해."

"왜 이리 걱정이 많은 것이야."

"신월이니 복사꽃들이 하나둘 떨어져서 그런가 봐. 걱정 마. 도림원의 주인으로 이 곳을 지킬 테니. 너는 동쪽의 수기들을 잘 다스리고 와줘. 훈이는 아마 동쪽의 수기와 기가 맞아떨어지면 그 힘에 놀랄 테니 챙겨준 무구 소매에 잘 넣어주고 그리고... 정이는 신월의 수기에 추워할 수 있으니 챙겨둔 솜옷을 동쪽에 당도하거든 입혀주고... 그리고..."

"현아."

"응?"


 

인국은 말을 더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현을 품에 안아 등을 토닥였다. 제 낭군의 수기에 감싸여 현은 그제야 눈을 지긋이 감고 그 품에 기대었다. 너도 느꼈을테지. 이상하리만큼 고요해진 도림원의 기운을 그리고 수상하리만큼 철썩이는 동쪽의 파도들도. 아이들을 동쪽의 서가에 보내는 이유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알고 있을 터. 모든 걸 다 안다는 그 토닥임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인국은 현의 예지를 깊게 물어보지 않아 왔다. 제 짝이기 이전에 하늘의 뜻을 품고 이해하고 그 신력을 널리 류진국을 위해 쓰는 도림원의 주인이었다. 사사로이 하늘의 뜻을 알려 하면 안됐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현의 기운의 움직임과 그 심사를 잘 아는 것도 인국이었다. 요즈음 도림원을 오가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있었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내 신당에서 정성을 들여 기도 올리는 현을 보며 상황을 짐작하였다. 아이들을 함께 동쪽에 보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동쪽의 서가는 거센 바다의 수기를 다스리기 위해 마물을 다루거나 신력을 가진 자들을 훈련한 사군(私軍)이 있었다. 류진국이 이 땅에 뿌리내린 이후부터 선을 잃고 악한 맘을 품은 채 날뛰는 이력을 가진 자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군대였다. 너도 몸을 조심하도록 해. 약속이야. 알았지? 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잡았다. 알았어, 걱정 마. 난 네 낭군이니 나를 믿어.


 

"현아 부디 너도 몸을 조심해야 해."


 

복사나무도 아이들도 도림원의 식구들도 모두 시선을 돌리는 찰나, 인국은 현의 입술을 강하게 베어 물어 기운을 모아 청룡의 수기를 아주 작게 흘려보냈다. 아주 작지만 강한 수기에 현이 모두 삼켜내며 인국의 도포 자락을 꼭 그러쥐며 웃었다. 짧은 입맞춤 후 현이 말했다. 복사나무가 우릴 놀리잖아... 하지만 고마워, 나무들도 청룡의 기운에 고마워해. 인국은 으쓱해 하며 말했다.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어찌 나무들은 매번 우릴 놀린다더냐. 걱정에 떨리는 현의 손을 잡고 괜스레 복사나무들에 으름장을 냈다.


 

"잘 다녀오마."

"응. 잘 다녀와."

"훈이와 정이는 고심초사하지 말거라. 우리 두 사람의 아이들이니."


 


 

인국과 아이들이 도림원을 떠나 하루가 지나고도 해가 다시 고개를 숙이려는 지금 한 시진(時辰) 전, 동쪽의 서가에서 온 연통이 도림원에 급히 닿았다. 동쪽의 바다에 격랑이 일더니 수기가 멀리 청연 너머로 밀려나며 메마르기 시작했다는 기별이었다. 수기가 밀려나니 잇따라 메말라가는 복사나무들의 괴로운 소리와 바람을 타고 걸린 이야기들은 현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혼인할 적 청룡을 도림원에 두기 위해 서가에 보낸 무구를 누군가 훔쳐 달아났다는 이야기었다. 이래서 더욱이 서둘러 인국과 아이들을 보냈건만 낭군이 동쪽 도착하려면 아직은 멀었다. 예지에선 내일에나 일어날 일이었거늘 그 어떤 힘은 도림원 주인의 예지를 거스르며 농락하는 듯했다. 뒤따라 계속해서 바람이 보내오는 소식들도 예지를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발 버텨줘. 부탁이야. 도림원의 주인으로서 이리 부탁하니 제발."


 

신월(申月).

신월은 만물이 색을 잃으며 마르고 후에 다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색을 내기 위해 아주 잠시 차디찬 동풍(冬風)을 견뎌내야 하는 수기도, 복사나무도 다른 사신들의 기운도 잠시 숨을 고르는 절기였다. 그래서 고된 절기를 무탈하게 지나가도록 도림원은 그간 신월이 다가오면 하늘에 제를 지내왔다. 인국이 동쪽에 당도하는 순간에 맞춰 준비하던 제를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낭군이시여, 조금만 서둘러주기를.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현은 마저 제를 위한 의복으로 환복하며 사당을 나섰다. 해가 저물고 달과 류진국의 별들이 복사나무를 비출 때 하늘에 제를 지내야만 했다. 이제 해는 중천을 지나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도림원의 모든 이들이 바스락거리는 복사나무 아래에서 분주히도 움직였다. 


 


 

인국은 동쪽을 지키던 청룡의 힘을 나눠 가둔 무구가 사라짐을 느꼈다. 계속해서 바다 위에서 격랑 하던 수기들이 밀려나 고개를 숙이더니 기어코 일은 일어났다. 영험하기로는 인국과 현보다 더 천기를 타고 태어난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 훈이 말하였다. 


 

"아버지."

"그 말을 하려거든 하지 말거라."

"하지만 저라도 도림원에는 가야 하지 않을까요? 수기가 필요할 겁니다."

"안된다. 누누이 말하지 안 하였느냐. 신월이다. 그리고 수기마저 무너졌어. 모든 기운이 약해 천기를 거스르고 네 뜻 대로 움직였다가는 영영 길을 잃고 말아. 너희들은 아직 불완전한 기운이야. 함부로 움직이지 말거라."

"하지만..."


 

훈이 더 나서려다 정이 오라버니의 손을 꼭 잡고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훈이 물었다. 왜 그래? 그 물음에 정은 다시 한번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봤어. 그러니 더 묻지 말고 아버지를 따라 동쪽으로 가자... 오라버니 그러자, 응? 정의 간청에 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 어쩐지 아까보다 더 냉기가 도는 바람들에게 멀리 도림원에 소식을 전해달라 간청했다. 우리는 곧 동쪽 서가에 당도한다고. 달과 별은 이미 하늘에 있으니 걱정 말고 제를 속행하셔도 된다고. 우리는 모두 무탈할 것이라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들만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중에 들리는 정의 소리에 현은 작게 미소 짓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맞았다. 하늘의 것은 늘 하늘에 있기 마련. 해에 눈이 멀고 보이지 않을 뿐 늘 하늘의 것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어쩜 이리 총명할까. 정의 총명함에 모든 이들에게 고했다. 제를 시작하겠다고. 미리 준비한 사신들의 기운을 나눠 담은 술잔을 제단 위에 올리고 하늘에 고하였다.


 

"여기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 그리고 류진국의 별과 이 복사나무 주인인 현이 인사 올리니 차디찬 신월에 조영(照影)은 사라지고 류진국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나이다."


 

무심하게도 하늘은 기어코 도림원에도 조영이 들게 하였다. 


 

사락-

사락-

​사락-


 

스산한 이명이 현의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마물의 온갖 것이 뒤엉키고 붙어 형체조차 사라진 그림자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며 도림원의 주인 앞에 나타났다. 현은 동요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림자 뒤로 해는 모습을 감추려 했고 곧 그림자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자취를 감출 테니 현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 기운은 아주 오래 전부터 늘 현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 같다. 낯설지도 않은 익숙한 기운이였다. 저를 처음 보시겠지만 저는 처음 뵙는 게 아니랍니다. 그림자의 말에 현은 말을 삼켰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어물쩍 넘어가려는 해를 바라보며 영 내뱉지 않던 얕은 한숨이 바람을 타고 넘실거렸다. 복사꽃마저 그 해넘이는 참을 수 없는지 잔뜩 소음이 일었다. 그 소음에 인상을 찌푸린 현은 메마른 기운에 조갈이 나는 것도 같았다. 어찌 이리 늦으시는 건지, 낭군의 기운은 아득하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수기가 필요했지만 그러지 못하는 걸 알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조악한 그림자로 복사꽃을 잡아먹으려거든 그만두거라."

"어찌 그리 조급해하십니까. 여리고 고운 빛에 저 같은 그림자라도 묻을까 염려되십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네 녀석이었다. 청룡을 도림원에 오게 한 막힌 물길도, 도림원의 복사나무를 괴롭히는 이명도, 동쪽의 수기가 마르는 것도."

"한낱 마물인 저를 이렇게 알아봐 주시니 망극합니다."

"어째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


 

현의 물음에 그림자는 웃으며 청룡의 기운을 담은 무구를 보여냈다. 역시 그것을 훔쳐 달아난 것도 네 녀석이구나. 무구에 갇힌 청룡의 기운이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평온하리만큼 정적이던 기운이 그림자에 어지럽혀져 날뛰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바람은 한점 불지 않았고 들려오는 이야기들도 전무하였다. 현은 버텨내어야 했다. 동쪽에서의 소식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점점 어둠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사군의 몇이 해를 입었습니까?"

"사당을 지키던 몇이 당한 것 같더구나. 사당에 가보겠느냐. 아직 그 마물의 기운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리 늦어서 송구합니다, 아버지."

"아니다. 네 속이 속이겠느냐. 도림원의 주인을 홀로 두고 오는 네 속은 오죽할꼬."


 

동쪽의 수기들이 모두 말라 버석거리는 땅 위로 청룡이 발을 딛으니 모두 수기를 달라 아우성치는 통에 인국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옥의 구덩이를 지나오는 것 같았다. 서가에 당도하자마자 훈과 정이 인국의 손을 잡아 오니 비로소 서가는 안정을 되찾았고 서가의 주인이자 인국의 아버지는 도림원 주인의 곡호(曲護) 아래 여전히 강건한 청룡의 기운에 안도하며 인국을 사당으로 안내하였다. 동쪽의 사당은 류진국 동쪽 땅 그 끝에 바다와 맞닿아있는 영험한 사당이다. 혼인 당시 현이 전달한 무구가 청룡인 인국 대신 사당에서 오랜 시간 수기를 맞으며 동쪽을 관장하고 있었으나 인국이 도착한 사당은 창가 밖으로 넘실거리던 바다의 파도도, 수기로 가득하여 늘 풍요롭던 공기도 그 어느 것 하나 멀쩡히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가 으득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사당 안으로 가 무구가 있던 자리에 두 손을 포개어 얹고 눈을 감아 기운에 집중했다. 무구에 나눴던 청룡의 기운 하나, 혼인을 하면서 도림원에 나눈 기운 하나, 변고가 생기고 아이들과 동쪽으로 출발하기 전 제 짝에게 나눠준 기운 하나. 인국은 청룡의 지친 울음소리를 들었다. 언제까지나 강건히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지친 청룡의 말이 죄책감에 들게 했다. 


 

"내게 남은 이 기운을 모조리 모아 이 곳의 수기를 되돌리면 청룡 너의 기운은 이제 온전히 내 것이 아니게 될 거야.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


 

인국은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떴다. 바싹 메마른 바다가 청룡의 주인을 향해 간절히 비나니 수기들이 모두 돌아오기를. 포개진 두 손 위로 남은 기운들이 물길로 변하고 사당의 공기가 흔들리더니 이내 무구를 대신할 청룡의 기운이 용맹하게 물길 사이로 모습을 나타냈다. 솨아- 밀려난 수기들이 나타난 청룡을 맞이하기 위해 청연을 뚫고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곧 철썩이는 파도 위에서 동쪽의 청룡이 포효했다. 수기가 되돌아왔노라고. 류진국의 모든 수기들이 다시 고개를 들어 들썩이기 시작했고 동쪽의 서가 인국은 수기를 잃고 이윽고 눈을 감고 풀썩 쓰러졌다. 청룡은 다시 한번 파도를 타고 흘러가는 바람 위로 포효했다. 저 멀리 도림원의 주인이시여 부디 서가 인국을 보살펴주시길. 곧 바람을 타고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도림원의 주인에게도, 서쪽, 남쪽, 북쪽이 사신들에게도. 류진국을 지킬 때가 왔노라고. 


 


 

수기를 가진 거센 바람이 복사나무들을 깨우고 제단 위 현의 하얀 의복은 바람을 따라 찰랑거렸다. 이제 곧 동쪽의 바다에서 온 수기들은 메말라 불타던 남쪽을 잠재울 것이고 신월이 오기도 전에 얼어붙던 남쪽을 녹일 것이고 귀곡성으로 미쳐가던 서쪽을 안정시킬 것이다. 제 속에 남아있는 청룡의 수기가 절로 숨을 타고 내뱉어졌다. 그럴 때마다 복사나무가 기지개를 켜듯 기꺼이 그 수기들을 받아내며 신월을 앞두고도 분홍빛의 꽃을 피워냈다. 준비가 되었다. 하늘의 달과 별에 올릴 제물까지 기꺼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올해의 신월은 그 어느 때보다 따사로운 신월이 될 듯했다. 그림자가 청룡의 기운을 가진 무구를 내밀었을 때 보았던 그림자의 기억들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려는구나. 때가 되었다."

"수기가 돌아왔군... 어리석은 청룡. 도림원의 낭군이 몸을 버리고 청룡을 놓아주었구나."

"도림원의 금줄에 고추가 매달렸을 때 너도 어둠에서 태어났다지. 그때 두려워하던 류진국 사람들의 두려운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복사나무에 매달리다 떨어져 번진 그늘에서 말이다. 늘 나를 지켜보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 억울하고 설 자리가 없으니 악에 받쳤을 것이야. 금세 사람들은 그 걱정을 지우고 다시 그늘진 마음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추악한 곳에서 태어나 어둠을 삼키고 커지니 욕심을 내버렸구나. 류진국을 조영으로 메워버리기로."

"물길을 막아 괴롭히는 것이 시작이었는데 말이지요.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길들이 너무 보기 싫지 않습니까?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납니다. 그 물길에 만물이 빛나는 것도 정말 역겨울 뿐이지요. 그런데 그런 저의 재미를 청룡과 복사나무의 꽃이 찾아와 다시 물길을 내어 망치는 것을 보자 하니 궁금했습니다. 아 저들에게서 빛을 빼앗으면 어떨까."


 

뒤이어 들리는 웃음소리에 현이 고개를 들어 어리석은 웃음을 내뱉는 그림자 뒤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봤다. 그림자 뒤로 달이 뜨기 시작했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사신들의 포효가 도림원을 가득 메웠다. 하늘은 다 뜻이 있었다. 그 뜻을 받아 널리 이롭도록 기도하고 이력들을 다스리는 것은 현의 몫이었으니 눈을 감고 낭군이 남긴 수기를 느끼며 기운을 모았다. 이윽고 달이 휘영청 그 빛을 그림자 위로 쏟아내니 당황한 그림자의 신음이 축축하게 제단 위를 덮었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현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림자를 묶어 조여왔다. 그림자는 외쳤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늘의 달이 이리 밝게 자신을 비추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밤은 어둠이라며 밤은 자신의 것이라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늘의 달과 별들이 맑은 하늘 위 환하게 빛나나니 이 어리석은 자의 기운을 모두 앗아가도록 하겠나이다. 류진국의 어둠을 보살펴주소서. 마지막 현의 기도 소리를 끝으로 달빛이 비추던 그 곳엔 사라진 그림자가 쥐고 있던 청룡의 기운을 담은 무구만이 덩그러니 제단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현은 그제야 온 마음을 다해 무너졌다. 떨리는 팔과 다리로 기어가 무구를 복사주에 씻겨내고 품에 안아 눈물을 흘렸다. 


 

"흐...흐윽..."


 

수기를 머금고 제 색을 찾은 복사나무도 현의 울음소리를 따라 파르르 떨어댔다. 인국이 기운을 모두 내어주고 그 육신이 푹 꺼져버렸다. 떨리는 손안에 있는 무구를 바라보며 서럽게도 울었다. 제발 동쪽에 당도할 때까지 버텨주기를. 나의 낭군이 멀리 청연 너머로 사라지지 않기를. 입에선 연신 말로 맺히지 못하는 간절함이 울음으로만 뱉어졌다. 고된 신월 제를 끝내고 휘청거리며 내려오자마자 현은 무구를 쥐고 도림원을 나섰다. 빨리 제 안에 있는 기운과 무구를 동쪽 땅끝 사당 제 자리로 돌려놔야만 했다. 힘이 빠져 몇번이고 넘어져 생채기가 나도 일어나 걸었다. 인국아 제발 기다려. 내가 갈게. 


 

"정아...?"


 

멀리 동쪽 서가에 있어야 할 정이 현의 앞에 나타났다. 천기를 거스르는 것은 안 된다 그리 일렀건만 기어코 정은 현의 앞에 나타났다. 함께 가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생채기로 가득한 현의 손을 꼭 잡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버지에게 같이 가요. 천기를 거스르면 안되지만... 오늘은 봐주세요. 네? 청룡의 기운을 닮아 맑은 눈동자가 의젓하면서도 현의 눈치를 보며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현은 정을 품에 꼭 안고 그 기운을 느꼈다. 그래, 그러마. 나와 함께 가면 안전할 것이야. 길을 인도해주련? 청룡에게 가자. 현의 말에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인 정이 웃자 도림원 앞 두 인영은 곧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정의 손을 잡고 눈을 뜬 곳은 동쪽의 서가 사당이었다. 땅끝 바다와 맞닿아 있는 사당에는 메말랐던 수기가 돌아와 넘실거리며 창밖으로 바다의 잔잔한 파랑이 일었고 그 위로 청룡이 걱정을 가득 안고 사당 제단 위에 누워있는 제 주인의 육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은 청룡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제 낭군에게 달려갔다. 곁엔 제 수기를 끌어올려 제 아버지의 육신을 보호하고 있던 훈이 있었다. 현은 눈물을 흘리며 수기로 감싸여있는 인국의 몸에 귀를 기울였다. 미약하게나마 박동하는 소리가 들려와 스러지듯 인국의 옆에 앉아 한 손에는 무구를 다른 한 손에는 인국의 차디찬 손을 잡고 천천히 낭군의 입에 입을 맞췄다. 하늘이시여, 이 의로운 청룡의 주인을 가엾이 여기시어 주기를 기도드리나이다. 도림원을 떠나기 전 받아낸 인국의 수기를 다시 제 주인에게 돌려주며 손 끝에 맺히는 청룡을 조심스레 인국에게 인도했다. 고단했을 청룡을 위로하고 다독이며 다시 제자리에 둘 무구 속 기운도 되돌려 놓자 맞닿아있던 입술 사이로 옅은 숨이 느껴졌다. 아버지! 그 기운을 느낀 훈과 정이 기쁘게 인국을 불렀고 곧 인국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철썩


 

청룡의 주인이 제자리를 찾자 바다는 기쁨에 더 큰 파도를 쳐댔고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사이로 인국이 현에게 작게 속삭였다. 현아, 연모해. 현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응, 나도. 내 낭군. 두 사람의 마음 사이로 격랑 하는 바다의 소리가 가득 메워졌다. 실로 태평성대였다. 


 


 

격동의 신월이 지나고 해를 넘어 여느 때보다 더 따사로운 춘계(春季)가 찾아왔다. 인국의 회복을 위해 신월 내내 함께 현은 인국과 함께 동쪽 서가에 머물렀다. 훈과 정은 서가의 사군 훈련소를 밥 먹듯 찾아가 이력이 있는 자들과 훈련을 하는 재미에 빠져 할아버지를 따라 바삐 다녔고 여유를 되찾은 인국과 현은 함께 바다를 거닐기도 하며 사당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수기를 되찾은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충만한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어느새 내일이면 도림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여지없이 아이들은 훈련소로 뛰어갔고 인국과 현은 바다가 보이는 사당에 앉아 이 여유를 만끽했다. 


 

"현아 갑작스럽겠지만 너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구나."

"무슨 말이야?"

"크흡..."


 

인국은 잠시 헛기침을 하며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 위를 뛰노는 청룡에게 고개짓하며 재촉을 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매번 도림원에서 바라보는 나무들 앞에서 현에게 입을 맞추고 서슴없이 다가갔건만 놀리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청룡과 눈이 마주치자 늘 부끄럽게 복사나무가 놀린다고 투정하던 현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갑작스러운 인국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현을 바라보자 바다의 수기를 받아 어여쁜 제 짝이 유난히 절색이어서 인국은 온 마음을 담아 입을 맞췄다. 복사나무 열매보다 더 달디단 맛에 인국의 수기가 따뜻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수기만큼 질척이는 소리로 가득 찬 사당 밖 인국의 눈치로 멀리 바다로 나온 청룡은 웃으며 바람에게 소식을 날려 보냈다. 이윽고 멀리 도림원의 복사나무도 재잘거리며 소란스러워졌다. 제 주인들에게 삼신이 곧 찾아갈 것 같다고. 허허 웃는 기운들에 이번엔 어떤 영험한 선물을 삼신이 점지해줄 지 기대에 차 류진국은 들썩였다.  
 

 

 만물의 기운이 흘러들어 별이 뜨고 가히 그 모습이 태평성대와도 같아 그 곳을 류진국(流辰國)이라 불렀다. 태초 별이 우뚝 설 때 신들이 동서남북을 수호하기 위해 이력(異力)을 가진 객으로 이 땅에 나타나 가문을 이루고 그 들을 사신(四神)이라 하였다. 동은 청룡, 서는 백호, 남은 주작, 북은 현무. 사신이 나라를 지키니 그 강한 힘과 함께 살기 위해 만물의 신들도 이력을 가진 객으로 나타나 마을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강한 힘들이 한데 모여 어지러운 나라의 중심에서 신묘하고 기이한 힘은 복사나무에 찬란히 복사꽃을 피웠다. 이력의 조화를 이루고 류진국의 여러 별들을 지키기 위한 복사나무가 꽃을 피운 자리는 도림원(桃林園)이라 하고 도림원에 사는 영험한 신기(神奇)를 지닌 도림원의 주인이 의로운 청룡과 함께하니 그리하여 이력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고 류진국의 후일은 원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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